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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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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국가란 무엇인가

등록 2013-07-23 14:23 수정 2020-05-03 04:27

미국 정보기술(IT) 산업의 요람인 실리콘밸리에서는 독특한 실험 하나가 진행되고 있다. 야심찬 프로젝트의 이름은 ‘블루시드’(blueSeed).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서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공해상에 최소 수백 명의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해상 거주시설을 세우는 게 프로젝트의 뼈대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그룹은 오는 2014년 3분기까지 해상 거주시설 건설을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둔 상태다.
흥미로운 건 이 해상 거주시설이 일종의 ‘가상국가’ 성격을 띤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엄연히 특정 국가의 관할 영역을 벗어난 공해상에 존재하는 공간이므로, 적어도 ‘원칙상’ 인접 국가의 법률 적용 대상에서는 벗어나 있다.
출발은 이랬다. 실리콘밸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한껏 무장한 젊은 인력이 전세계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다. 문제는 비자 규정 등 미국 내 까다로운 입국 절차와 노동 관련 법규가 이들 인력을 제때 끌어들이는 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 미국 의회에서 비자법 처리가 지연되자, 실리콘밸리의 일부 기업이 몇 년 전 아예 극단적인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비자가 필요 없는 공해상에 ‘생산현장’을 세운 뒤, 전세계로부터 자유로이 몰려든 인력이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보자는 얘기다.
블루시드 프로젝트는, 흔히 시스테딩(Seasteading)이라고도 불리는 ‘바다 위의 거주공간 만들기’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시스테딩이란 육지 위에 세워진 안정적인 거주지를 뜻하는 홈스테딩(Homesteading)을 빗댄 말이다. 유엔미래보고서는 향후 눈여겨볼 만한 주요 흐름의 하나로 시스테딩을 꼽고 있다. 실제로 세계적인 온라인 결제시스템 페이팔의 창업자 피터 시엘은 이미 시스테딩 프로젝트에 큰돈을 쾌척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시스테딩이 인류가 머지않아 마주할 미래의 주요 흐름의 하나로 눈길을 끄는 이유는, 단지 인간의 물리적 거주 무대를 바다로 옮겨놨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핵심은 근대 세계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의 작은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공해상에 들어서는, 심지어 바다 위를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도 있는 그곳은, 국가(에 속하기)와 국민(되기)이라는 극히 낯익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실험장이다. 물론 치안과 방위, 조세와 법률체계 등 현실 속의 의미있는 해법으로 등장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험난하기만 하다. 다만 굳이 시스테딩 방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존근대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유엔고등난민판무관(UNHCR) 주도로 보스니아 내전 피해자들을 보듬기 위해 ‘뉴보스니아’라는 가상국가를 세우려는 시도 같은 게 대표적이다.
중요한 건, 이런 ‘해괴한’ 실험의 현실성 여부를 떠나 그것이 가져올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따져보는 일일 듯하다. 블루시드 실험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기업 주도로 진행되는 가상국가 건설 실험은 자칫 자본 ‘국적성’의 마지막 흔적마저 극단적으로 없애는 동력으로 작용할 여지도 크다. 흔히 자본의 이동은 자유로운 반면, 노동력의 이동은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지난 20~30년 동안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세력 간 힘의 균형이 기업(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무너진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공장 이전을 무기로 내세운 ‘자본의 파업’이 횡행한 탓이다. 외견상 노동력 이동의 자유마저 온전하게 보장하는 듯 보이는 새로운 실험장. 그곳은 과연 모든 규제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완벽한 초국적성을 획득한 자본의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지난 세기 갈등과 반목의 아픈 기억을 떨쳐버릴 수 있는,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유토피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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