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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헌신?

등록 2013-01-08 14:34 수정 2020-05-03 04:27
944호 부글부글

944호 부글부글

미안해요. 그렇게 자주 생각나진 않았어요. 그래도 아주 잊은 건 아니에요. 정말정말 심심하거나 도무지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거나 시청역 주변을 지나가거나 할 때는 간혹 떠올리곤 했어요. 오세훈 전 서울시장님, 잘 지내시죠? 왔다 가신 것도 몰랐네요. 쓸쓸하게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최근 중국 상하이에 머물고 있었다네요. 대선을 앞둔 지난해 12월14일 잠시 귀국했어요. 투표를 위해 돌아오셨다는군요.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박근혜 후보가 경제와 외교·안보에서 비교 우위에 있다”며 굳이 지지를 표명하셨더랬죠. 스스로를 “정치적 죄인”이라며 “자숙하는 마음으로 지내겠다. 정치를 그만두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어디에 계시든 늘 건강하세요. 그 마음 잊지 마시고요.

사실 근황을 다시 찾아보게 된 계기는 또 다른 훈이, ‘한 살 훈이’ 때문이었어요. 누구냐고요? 바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에요. 자연스럽게 ‘원조 훈이’이자 ‘다섯 살 훈이’ 오세훈 전 시장이 연상되더군요. 요즘 한 살 훈이는 속이 상하나봐요. 대선 과정에선 어찌어찌 넘어간,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사진)의 여론 조작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거든요.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대선 사흘 전인 12월16일. 마지막 TV토론이자 박근혜·문재인의 첫 양자 토론이 끝났어요.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느닷없이, 그것도 밤 11시에 “혐의가 없다”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해요. 이날 중간수사 발표는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 작품이에요. 대구 사람인 그는 박근혜 당선인이 이사장을 지낸 영남대 출신이고요,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정원에서 근무하다 경찰로 자리를 옮긴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죠. 관가에선 그가 박근혜 정부의 초대 경찰청장을 노리고 있다는 설이 파다해요. 공신이다, 이거겠죠? 하기야 BBK 수사를 시원하게 ‘무혐의’로 쫑낸 검사들은 이번 정권에서 다들 승승장구했어요. 이번엔 경찰에서 노려요. 줄들은 참 잘 서요. 검경 합동 줄서기 본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잘들 해처먹고 계시는군요. 어쨌거나 오세훈(5)과 원세훈(1)을 더하니 6이네요. 5+1=6. 5·16? 아니, 51.6%? 에라이~!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국정원의 원훈이에요. 수사를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국정원 직원의 행태는? 글쎄요. 특정 후보를 위해 인터넷 게시판이나 어슬렁거리는 게 자유,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본인 인증을 안 해도 되는 방식으로 가입하고 활동한 것을 보면 ‘무명’이 맞는 것 같기는 해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수개월 동안 남의 글에 추천 혹은 반대를 누른 일이 250건쯤 된다고 하니 아직 ‘헌신’인지 판단하기는 이르겠죠? 주로 ‘오늘의 유머’라는 사이트를 공작 대상으로 삼았다나요. ‘오유’는 나름 유명한 사이트예요. 진보적, 야당 성향의 네티즌이 많죠. 야권 인사에 의해 반대편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종북 해커의 각을 뜨자”고 가스통 시위라도 했을 텐데 이분들, 쿨해요. “설마설마했는데 오유라니 ㅋㅋㅋ.” 이런 반응도 있더군요. “공무원을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딱 걸린’ 공작의 현장에서 옥쇄에 들어갔던 국정원 직원을 정치놀음에 희생된 가련한 여인쯤으로 만들어보려던 집권 여당, 그 당 출신의 대통령 당선인, 수사고 뭐고 면죄부부터 줬던 경찰, 그리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든 말든 국내 여론 조작에 열 올리던 국정원. 그렇지 않아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씀 하셨네요.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됐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이 태어나서 살기 행복한 나라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에효, 너님은 이제 그만 빠지세요, 쫌.

송호균 기자">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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