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후(幕府) 시대 일본에는 산킨코타이(參勤交待)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만든 것으로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바쿠후 소재지인 에도(江湖·현재의 도쿄)와 자기 영지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게 한 것이다. 다이묘들을 쇼군(將軍)의 인질로 삼아 감시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는데, 부수적으로는 다이묘들에게 과도한 경비를 부담시켜 군비 저축을 방해하는 효과도 있었다. 다이묘들은 휘하의 가신(家臣)과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에도와 자기 영지 사이를 왕래하느라 매년 엄청난 지출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다이묘들에게 번거로움과 낭비성 지출을 강요한 이 제도는, 에도와 다른 지역 사이의 도로망 정비를 촉진했고, 도로 연변의 상업 활동을 자극했다. 누군가가 길에 돈을 뿌리면, 그 돈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일 막부정권 치하에서 탄생한 ‘유가쿠’
다른 무엇보다도 숙박업이 융성했고, 다이묘 일행의 대다수가 남성이었기에 숙박업소의 부대시설 또는 유관시설로서 ‘유가쿠’(遊廓)도 번창했다. 유가쿠란 공인된 집창촌인데, 이를 처음 만든 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유가쿠는 처자를 고향에 두고 매년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물러야 했던 다이묘의 가신과 사무라이들을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유가쿠의 번성에는 바쿠후 시대 일본의 수공업 발달도 한몫했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유사한 동직자 조합은 조선과 중국에도 있었으나, 일본의 장인 조직은 특히 유럽 길드와 흡사했다. 일본의 도제들은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수련을 거친 뒤에야 독립할 수 있었으며, 독립하기 전에는 결혼하기 어려웠다. 그 탓에 이 직종 남성들의 초혼 연령은 30살이 넘었다.
물론 유가쿠를 번성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일본의 성문화가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개방적’이었다는 점이다. 도쿄에서 ‘남녀 혼욕’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이었지만, 이 풍습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남녀 혼욕과 유가쿠는 서양인들의 일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핵심 요소였으며, 일본 지식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한 자기 표상이었다. 를 쓴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유가쿠를 가부키와 함께 에도 문화의 두 정수로 꼽았다.
한성 개시(開市) 직후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 ‘남성’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서울에 유가쿠 비슷한 시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익숙한 문화’에서 벗어날 각오를 하고 오기는 했으나, 이 ‘문화’는 그들의 ‘본능’에 직결돼 있었다. 물론 서울에도 성매매 여성은 있었지만 ‘여성의 성’만을 독립적으로 판매하는 ‘시설’은 없었다. 조선에서 여성의 성은 술이나 기예와 결합된 ‘상품’으로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일본인이 그 상품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서울 거주 일본인 사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들어온 모험적 이주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민자 사회’는 어느 곳에서나 심한 ‘남초(男超) 양상’을 보이기 마련인바, 서울 거주 일본인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인이 급증하자, 서울과 개항장 도시들에는 일본에서 유녀(遊女)를 불러들여 은밀히 ‘영업’하는 여관과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일본영사관은 ‘제국의 체모’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일부 ‘밀매음녀’들을 적발해 귀국시켰으나, 이런 종류의 영업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영사관은 이들을 철저히 뿌리 뽑는 것도 ‘풍속상’ 다른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인 남성들의 출입이 유난히 잦은 식당과 술집들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기도 했다.
“이주자 성욕 해소는 일본 ‘공익’ 위해 절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수십만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향했다. 서울에는 아예 사단 규모의 병력이 점령군으로 상주했다. 일확천금의 기회를 찾는 민간인이 일본군의 뒤를 따랐다. 1903년 3865명이던 서울 거주 일본인은 1904년 6673명, 1905년 9377명, 1906년 1만4303명으로 급증했다. 물론 군인은 제외한 수다. 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은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 독신 남성의 ‘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기들의 ‘공익’을 위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새로운 ‘공익시설’의 적격지로 찾아낸 곳은 ‘공교롭게도’ 장충단 바로 옆이었다.
장충단은 1901년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일본 낭인배들에게 희생된 장졸들을 추모하려고 만든 시설이었다. 1902년부터는 여기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희생된 사람들을 추가로 배향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립 현충 시설’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배향된 인물들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이었고, 매년 봄과 가을에 장충단에서 거행된 추모의식은 일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이 시설, 이 행사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국인 남성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것도, 자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조롱하는 것도, 모두 ‘공익’에 합치하는 일이었다.
1904년 6월 경성 일본 거류민단은 일본군의 힘을 배경으로 쌍림동 일대에서 7천여 평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그들은 이 땅을 일본인 ‘유곽업자’들에게 임대해 유곽지대로 만들고는 스스로 ‘거류민단 최초의 공익시설’이라고 자랑했다. 임대료 수입은 이후 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유곽 지대에 신마치(新町)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신마치 또는 신지(新地)는 일본에서도 유곽 동네에 관행적으로 붙이던 이름이었다.
일본인 유곽업자들은 일본에서 유녀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한국인 여성들도 ‘고용’했다. 노름빚에 몰린 패륜 아비가 딸을 팔아넘기기도 했고, 구박을 견디지 못해 시집에서 탈출한 새색시가 속임수에 넘어가 흘러 들어오기도 했다. 한국인 여성들이 유곽 한구석에 자리잡자 한국인 남성들도 모여들었다. 신성한 현충(顯忠)의 장소는 이렇게 가장 방종하고 타락한 장소로 전복되었다.
확산되는 유곽 문화, 조선인 성문화도 바꿔
서울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유곽은 일본군을 위한 준군사시설이자 공익시설이었다. 이 시설은 한국에 자리잡자마자 강력한 힘으로 한국인들의 성문화 전반을 일본식으로 바꿔나갔다. 유곽 출입을 시작한 한국인 남성들은 자기 문화의 심층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를 명료히 인지하지 못했고,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의 목소리가 높을 때조차 일제 잔재의 핵심 중의 핵심이 이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지 못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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