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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마저도 평화롭구나!

유부도에서 만난 도요·물떼새, 위태로운 나그네들의 마지막 오아시스 아니길…
등록 2026-10-15 20:32수정 2026-10-18 08:42
2026년 9월28일 바닷물이 턱밑까지 차오른 만조 무렵, 충남 서천 유부도 해안에 티스푼 모양의 뭉툭한 부리를 지닌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넓적부리도요(오른쪽 둘째)가 흰물떼새와 왕눈물떼새, 민물도요 사이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한때 전세계에 불과 수백 마리밖에 남지 않아 탐조객의 애를 태우던 이 위태로운 나그네는, 특유의 주걱 부리로 힘겨운 남하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채운다.

2026년 9월28일 바닷물이 턱밑까지 차오른 만조 무렵, 충남 서천 유부도 해안에 티스푼 모양의 뭉툭한 부리를 지닌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넓적부리도요(오른쪽 둘째)가 흰물떼새와 왕눈물떼새, 민물도요 사이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한때 전세계에 불과 수백 마리밖에 남지 않아 탐조객의 애를 태우던 이 위태로운 나그네는, 특유의 주걱 부리로 힘겨운 남하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채운다.


 

2026년 9월 말, 충남 서천의 작은 섬 유부도 모래톱은 지친 날개를 접고 쉬어가는 나그네새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만조가 다가오자 갯벌이 빠른 속도로 물에 잠기며 평화롭던 북쪽 해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차오르는 바닷물을 피해 수만 마리의 도요·물떼새가 점점 좁아지는 모래톱 한 뼘 공간으로 쉼 없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회갈색 겨울깃으로 갈아입는 중인 새들은 얼핏 바닷가 모래알처럼 보이지만, 쌍안경 초점 링을 맞추면 군집 속에서 저마다의 선과 색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서로 다른 체구, 제각각의 부리와 깃털을 지닌 새들은 바닷바람 부는 쪽을 향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다. 부리를 깃 속에 묻고 한 발로 서서 쪽잠을 청하는 시간이다. 시베리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지는 고된 이동과 먹이 사냥 사이, 바닷물이 모래톱을 온전히 삼키기 전 잠깐 눈을 붙인다.

쌍안경과 망원렌즈를 챙겨 온 탐조인들과 함께 모래톱 한쪽 구석에서 물때에 새를 기다렸다.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닿을 만큼의 거리까지 새들이 다가올수록 렌즈 너머를 훑는 눈동자가 바빠진다. 모래밭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무리 중, 목덜미의 갈색 띠가 앞가슴에서 살짝 끊어지고 뒷목이 희다면 흰물떼새, 뒷목의 갈색이 앞가슴까지 이어지고 체구가 다부진 건 왕눈물떼새다. 드물게 보이는 큰왕눈물떼새는 부리가 왕눈물떼새보다 길고 두툼하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붉은가슴도요와 붉은어깨도요는 등판의 비늘 깃무늬로 갈린다. 화려했던 여름의 붉은 깃 대신 잿빛 깃으로 바뀌는 중이지만, 어깨와 등에 선명한 검은색과 흰색의 비늘무늬는 붉은가슴도요만의 흔적이다. 시선을 물가로 돌리면 부리의 진화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아래로 완만하게 휜 부리로 갯바닥 깊은 곳을 찌르는 민물도요 틈바구니로, 노란 다리에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부리를 뽐내는 뒷부리도요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거센 포말이 이는 파도 앞에는 터줏대감 괭이갈매기와 달리 단정하고 귀족적인 자태를 뽐내는 멸종위기종 고대갈매기가 꼿꼿이 서서 탐조인을 설레게 한다. 누구는 위로 휜 부리로 펄을 훑고, 누구는 길고 뾰족한 부리로 갯지렁이를 잡으며, 누구는 짧은 부리로 표면을 쫀다. 서로 먹이를 찾는 깊이와 대상이 다르기에, 한 뼘 모래톱에서도 함께 부대끼며 지낸다.

시베리아 툰드라에서 남태평양까지 1만㎞를 날아가는 가을 이동기, 수만 마리의 도요·물떼새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다시 갯벌에 내려앉기를 반복한다.

시베리아 툰드라에서 남태평양까지 1만㎞를 날아가는 가을 이동기, 수만 마리의 도요·물떼새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다시 갯벌에 내려앉기를 반복한다.


파도가 들이치는 만조선 앞, 하얀 가슴을 꼿꼿이 세운 진객 고대갈매기(왼쪽 큰새)가 터줏대감 괭이갈매기(오른쪽)와 작은 도요새 무리 틈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파도가 들이치는 만조선 앞, 하얀 가슴을 꼿꼿이 세운 진객 고대갈매기(왼쪽 큰새)가 터줏대감 괭이갈매기(오른쪽)와 작은 도요새 무리 틈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아래로 휜 부리의 민물도요들 사이로 주황빛 다리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부리를 뽐내는 뒷부리도요(맨 오른쪽)가 서 있다. 부리의 길이와 각도에 따라 갯벌에서 먹이를 잡는 법이 다양하다.

아래로 휜 부리의 민물도요들 사이로 주황빛 다리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부리를 뽐내는 뒷부리도요(맨 오른쪽)가 서 있다. 부리의 길이와 각도에 따라 갯벌에서 먹이를 잡는 법이 다양하다.


겨울깃으로 갈아입은 붉은가슴도요(앞줄 왼쪽 두 마리)와 붉은어깨도요. 얼핏 보면 한 무리 같지만 붉은가슴도요는 등판의 비늘무늬가 눈에 띈다.

겨울깃으로 갈아입은 붉은가슴도요(앞줄 왼쪽 두 마리)와 붉은어깨도요. 얼핏 보면 한 무리 같지만 붉은가슴도요는 등판의 비늘무늬가 눈에 띈다.


뒷목이 흰 흰물떼새(왼쪽)와 등 갈색을 띠는 왕눈물떼새가 모래톱에 나란히 서 있다.

뒷목이 흰 흰물떼새(왼쪽)와 등 갈색을 띠는 왕눈물떼새가 모래톱에 나란히 서 있다.


수많은 새 중 진짜 보고 싶은 새는 따로 있다. 15㎝에 불과한 덩치로 비슷한 외모를 가진 좀도요 무리에 섞여 있으면 가장 찾기 힘든 녀석. 아지랑이와 습한 바닷바람에 카메라 뷰파인더가 흔들리고 눈이 뻐근해질 무렵, 기적처럼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렌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티스푼을 얹어놓은 듯 앙증맞게 뭉툭한 주걱 모양의 부리. 날개깃에 파묻었던 고개를 돌려 뭉툭한 부리를 확인한 순간 온몸으로 짜릿한 전율이 번졌다. “찾았다!” 한때 전세계에 불과 수백 마리밖에 남지 않았던, 지구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나그네 ‘넓적부리도요’(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다. 티스푼처럼 생긴 부리야말로 도요·물떼새와 함께 갯벌에서 먹이를 나눌 수 있게 변한 ‘평화적 진화’의 흔적 아닐까.

새들의 평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도요새들의 오랜 쉼터였던 서해안 갯벌이 간척과 개발로 방조제 뒤편에 갇히고 마르면서, 넓적부리도요와 도요·물떼새의 개체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새만금이 닫힌 뒤, 금강이 서해로 흘러들며 빚어낸 유부도가 이들에게 마지막 오아시스처럼 남아 있는 셈이다. 밀물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다리가 긴 알락꼬리마도요들은 무릎까지 차오른 물살을 버텨내지만, 몸집 작은 도요들은 파도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는다. 마침내 바닷물이 덮쳐오자 무리를 지어 허공으로 일제히 솟구쳐 오른다. 수만 마리 나그네새가 바람을 가르며 하늘에 거대한 파도를 만든다.

 

유부도(충남 서천)=사진·글 김진수 사진가 jsk3927@gmail.com

 

*김진수는 1994년부터 2026년 5월까지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회 현장과 생태, 야생 조류를 카메라에 담았다. 오랜 현장 취재를 마친 지금은 들과 갯벌을 자유롭게 다니며 새를 만나고 있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새의 생태를 깊이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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