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5차 유해발굴 개토제(뫼를 쓸 때, 흙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열린 2월22일, 아직 언 땅이 녹지 않아 삽으로 흙을 파내기가 어려웠다. 한낮이 돼 햇볕이 내려앉자 땅이 녹아 질퍽거렸다. 박선주 공동조사단 유해발굴 단장(충북대 명예교수)은 “돌아가신 분들의 유해가 여러 겹 켜켜이 쌓여 있어 한분 한분 제대로 발굴해서 모시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부녀자의 것으로 보이는 비녀 여러 개, 일가족으로 보이는 부부와 젖먹이 아이의 유해가 함께 출토됐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현장에서 발견된 90여 개 비녀 </font></font>참여정부는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만들었다. 그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 전후 국가 공권력으로 숨진 민간인을 전면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유해를 발굴해 조사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전국 168곳의 지표조사를 한 뒤 13개 지역을 발굴하고,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 개를 수습했다. 그러나 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끝내면서 유해발굴 사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뜻있는 시민단체들이 공동조사단을 만들어 2014년 2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일대에서 1차 발굴을 했다. 발굴 사업은 지난해 4차까지 진행됐고,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일대에서 5차 발굴이 시작됐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아산에서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북한군 점령 시기에 부역 혐의가 있거나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이 학살됐음이 확인됐다. 민간인을 학살한 이들은 온양경찰 등 국가 공권력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등 우익 청년단체였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해의 특징은 여자와 아이의 유골이 많았다는 것이다. 부역자로 지목된 이들은 물론 그 가족까지 붙잡아 학살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90개 넘는 비녀가 발견돼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진실화해위의 2009년 보고서를 보면, 참상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온양경찰서 수사계에서 일한 임○○씨는 “부역 혐의자가 너무 많아 온양결찰서 유치장뿐만 아니라 경찰서 뒷마당에까지 구금했다. 매일 밤 트럭으로 수십 명씩 부역자들을 처형 장소로 실어다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부역 혐의자들은 주민들의 증언이나 밀고로 체포됐고, 조사 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 등이 저질러졌다. “학살 장소에 주검이 가득했고 어린아이는 하루이틀 울다가 죽었다”(생존자 임○○씨)는 증언도 있다. 진실화해위는 이 학살에 대해 “경찰과 우익단체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행위는 반인륜적 국가범죄”로 규정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연좌제 겁나 뒤늦게 찾은 학살터 </font></font>그렇지만 유족 대부분은 학살이 일어나고 67년이 지나도록 연좌제가 겁나 부모와 형제가 학살된 매장터를 찾지 못했다. 이날 처음 학살터를 찾은 박주순(82) 할머니는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그날 부모님과 가족들이 이유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오다 엄마, 여동생, 남동생과 기적적으로 대열에서 도망쳐 동네 화장실에 숨었다. 이윽고 굉음의 총소리가 계속 났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당시를 떠올리는 박 할머니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1973년 미국 이민을 떠난 박아무개(75)씨는 유해발굴 소식을 언론으로 전해들은 뒤 한걸음에 태평양을 건너 고향을 찾았다. 박씨는 “바로 위 누님이 최근 숨지기 전 ‘외부 사람은 물론 아이들, 며느리에게까지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세상이 또 바뀌면 우리도 아이들도 죽을 수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시골 사람들이 뭘 알았겠느냐. 정치 이념을 모르는 우리 부모님은 북한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국가가 나서서 유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박씨는 “내 이름을 지면에 싣지 말라”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유가족인 김광욱(73)씨는 유해발굴 기간에 발굴단을 열성적으로 도우며 현장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 삼형제가 이곳에서 함께 학살됐다. 집 안 마루 밑에 숨어 지내던 아버지와 콩밭에서 일하던 아버지 형제들을 동네 청년들이 경찰서로 끌고 갔다. 며칠 뒤 어머니가 면회를 갔지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경찰서 직원이 “(당신 남편은) 금광에 끌려가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지난 3월31일 다시 찾은 현장에서 안경호 발굴조사단 총괄팀장(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40일간의 유해발굴을 종료하며 “여리디여린 아기 갈비뼈와 엄마 신발 속 발뼈와 총탄으로 구멍나고 일그러진 머리들을 확인했다. 이보다 더한 참담함이 어디 있겠느냐”는 심경을 밝혔다.
올해는 제주4·3이 벌어진 지 70년 되는 해다. 제주4·3과 육지에서 일어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대량학살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다. 1948년부터 제주에서 섬 주민 3만여 명을 무참하게 죽인 이승만 정권은 1950년 터진 한국전쟁을 전후로 전국 최소 168곳에서 수많은 이를 집단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출신으로 소설 을 통해 4·3의 참상을 처음 한국 사회에 전한 작가 현기영은 언론 인터뷰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서 있는 기념비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 그러면 홀로코스트가 다시 일어나고 말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4·3에 대입해보라. 4·3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이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억하고 재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자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려는 건 이같은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font size="4"><font color="#008ABD">학살지 168곳 중 18곳 발굴 그쳐 </font></font>진실화해위가 그동안 밝혀낸 민간인 학살 ‘킬링필드’는 168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정부 차원의 발굴은 13곳으로 끝났고, 공동조사단은 5곳을 발굴했을 뿐이다. 시민들과 유가족, 일부 뜻있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정부는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해가 모두 발굴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루속히 학살터에서 검은 흙을 거둬내 숨진 이들과 유족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
아산(충남)=<font color="#008ABD">사진·글</font>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2018)
(2017)</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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