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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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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속의 검은 피

[노순택의 풍경동물]
등록 2025-07-03 18:55 수정 2025-07-08 14:45
진드기야, 어릴 적 내 머리엔 흡혈곤충이 살았단다. 머리털 빠지도록 참빗으로 빗으면 신문지 위에 우수수 떨어지던 머릿니들. 어느새 사라진 그 녀석들이 네 사촌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라. 분류학상 놈들은 곤충강, 너희는 다리 여덟 개 달린 거미강. 둘 사이에 강이 흐르지만, 닮았어. 너희가 빨고 간 자리에 남은 미칠 듯한 가려움. 2025년 경남 남해.

진드기야, 어릴 적 내 머리엔 흡혈곤충이 살았단다. 머리털 빠지도록 참빗으로 빗으면 신문지 위에 우수수 떨어지던 머릿니들. 어느새 사라진 그 녀석들이 네 사촌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라. 분류학상 놈들은 곤충강, 너희는 다리 여덟 개 달린 거미강. 둘 사이에 강이 흐르지만, 닮았어. 너희가 빨고 간 자리에 남은 미칠 듯한 가려움. 2025년 경남 남해.


도시 살 때 얘기다. 집을 오래 비울 사정이 생겨 기르던 개를 시골 사는 친구에게 맡겼다. 한 달 뒤 데려왔는데, 이 녀석이 반갑다고 난리블루스를 추더니 거실에서 부스스 몸을 털었다. 바닥에 새까만 깨알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풀씨가 털에 붙어 있었나 싶어 빗자루로 쓸어 담으려는데, 까만 깨알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고 경악했다. 아기 진드기였다. 수백 마리는 족히 되는 놈들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중이었다. 비상사태! 정신이 아득했다. 퍼뜩 떠오른 생각이 상자 테이프였다. 테이프를 넓게 잘라다가 한 놈도 남김없이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얼른 개를 데리고 나가 털을 빗겨줬다. 이번엔 까만 콩들이 떨어졌다. 크기나 생김새가 아주까리 씨앗과 비슷했다. 얼룩무늬만 그려 넣는다면 영락없는 아주까리였다. 씨눈이 살짝 튀어나온 것조차 닮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는데 씨눈이 움직였다. 벌레 머리였다.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단 말인가. 몸뚱이는 강낭콩만 한데, 머리와 다리는 개미 것만 했다. 뒤뚱뒤뚱 잘 기어다니지도 못했다. 대체 무엇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 또한 진드기였다. 피를 잔뜩 빨아 배가 부풀어 오른 암컷이었다. 막대기로 짓누르니 까맣고 진득한 피가 툭 터져 나왔다. 촘촘한 빗을 사다가 개털을 얼마나 빗겨주고, 꼼꼼하게 목욕시켰는지 모른다. 나와 진드기의 끔찍하고 전격적인 첫 만남이었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게 직업이고,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진드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숱하게 접했지만, 놈을 대면한 적도 놈한테 물려본 기억도 없었다. 진드기는 그저 책이나 경고문에서나 만나는 상상의 벌레였다. 하지만 귀촌 이후 놈은 내 삶에 붙어 있다.

진드기는 이름 그대로 진득한 녀석이다. 다리 끝에 한 쌍의 갈고리가 달려 있어 풀숲을 지나가는 먹잇감의 살이나 털에 쉽게 달라붙는다. 갈고리 덕에 개미가 오르지 못하는 미끌미끌한 표면마저 잘도 기어오른다. 도사견이나 자라처럼 한번 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지언정 먹이를 놓지 않는다. 모기처럼 잠깐 빨고 달아나는 게 아니라 길게는 열흘이나 피를 빤다. 전자현미경으로 진드기의 주둥이를 보면 작살처럼 역방향으로 수많은 돌기가 나 있어 한번 찔러 넣으면 좀처럼 뺄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수컷의 정액에는 폭식 유발 물질이 있어 암컷이 흡혈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실컷 피를 빨고, 몸을 10배로 불린 뒤에야 암컷은 알을 낳으려 먹잇감에서 떨어져 나온다.

‘살인진드기’란 악명을 쓴 작은소참진드기의 0.5%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품고 있다. 치사율이 독감 정도이므로 살인진드기란 명명은 공포마케팅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한번 물리면 지긋지긋하게 가렵다.

“진드기가 아주까리 흉보듯”이란 속담이 있는데, 보잘것없는 주제에 남 흉보는 걸 빗댄 말이다. 속담을 알기 전부터 단박에 아주까리를 떠올린 걸 보면 둘은 절묘하게 닮았다. 청산가리 수천 배에 이르는 독성의 아주까리, 비할 데 없는 가려움의 참진드기. 그 치명적인 독기마저도.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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