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를 본 적도, 먹은 적도 많았지. 하지만 끈적한 널 ‘손질’한 건 처음이었어. 홍어의 본고장 흑산도 어시장에서 연신 들었던 경고,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가 확 이해되더구나. 사람에게 잡혀 동백나무에 걸린 채 마르게 될 줄 누군들 알았을까. 삶과 죽음의 순환은 생각할수록 거부하게 되지만, 그러다가 수긍하고 만다. 거부와 수긍 사이에 너와 네가 헤엄치고 마르고.
쑥스러웠던 걸까. 처음엔 구체적인 지명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머나먼 남쪽 끝, 바닷가’에 내려가 산다고 말했다. 상대방이 구체적으로 캐물어야 ‘경상남도 남해’라고 답해줬다. 재밌는 일은, 시간이 흐른 뒤에 상대를 만나면 내가 ‘전라남도 해남’에 사는 줄 알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그럴 때 나의 대답은 “네, 맞아요”가 된다. 남해면 어떻고, 해남이면 또 어떠한가.
남해는 경상도지만, 전라도와 붙어 있다. 바다 건너 코앞에 여수가 보이고, 남해대교를 건너는 순간 광양이 인사한다.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인구마저 줄어들면서 배편이 끊겼지만, 오래전에는 남해와 여수를 잇는 배가 하루에도 여러 편 있었다. 남해와 여수-순천-광양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함께 견디며 남도의 해양문화를 나눠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도와 전라도는 참 다르다.)
새마을금고 담벼락 아래에서 생선을 손질해 파는 ‘술꾼 할마시’를 처음 본 건 20년도 더 된 일이다. 술을 무척 좋아하고, 욕이 살짝 섞인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난데없이 발사하는 독특한 분이었기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다. 남해로 내려와 살고부터는 새 삶에 적응하느라 할마시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봄,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우리 동네로 올라오는 그분을 발견하고 얼른 달려가 짐을 들어드렸다. 버스로 세 정거장을 달려야 하는 이곳까지 생선을 이고 온 까닭은 마을 끄트머리 거동 불편한 할머니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소설 쓰면 스무 권도 모자랄” 순천댁의 이야기를 맛만 봤다. 가을 무렵, 장모님과 순천댁을 모시고 동네에서 아귀찜을 먹다가 느닷없이 “너는 인자부터 내 사위나 다름 없응께”라는 말을 들었다. 오가는 술잔 속에 눈물과 웃음이 짬뽕처럼 뒤섞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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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접어들며 순천댁은 머물던 자리에서 쫓겨나 면사무소 담벼락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뒹굴던 소주 한 상자가 눈에 밟혀 얼른 갖다드렸다.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무리 사위래도 공짜는 싫응께, 뭣 좀 가져가”라는 순천댁과 “냉장고에 생선이 충분하다”고 응수하는 가짜 사위의 다툼에서 패자는 뻔했다. 아침에 다 팔고 남은 게 없다며 동백나무에 걸어둔 꾸덕꾸덕하게 말린 가오리 한 마리를 내 손에 들려줬다. 아쉬웠을까, 돌아서는 나를 붙잡더니 생가오리 두어 마리를 더 꺼냈다.
가오리 손질은 난생처음이었다. 눈으로 보았던 끈적임과 손으로 만져본 끈적임은 차원이 달랐다. ‘삭힌 홍어’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몸체와 꼬리 곳곳에 숨은 듯 솟아난 날카로운 가시는 매서울 정도였다.(노랑가오리의 경우 사람을 죽일 만한 맹독을 가시에 품고 있다.)
따라쟁이처럼 마당 동백나무에 가오리를 걸었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모습에 남해로 가출해 평생 ‘물괴기’를 내다 팔며 늙어간 순천댁의 삶이 깃들어 있었다. 불현듯 그가 사투리로 들려주는 물괴기 이야기를 잘 받아적는다면 이 또한 우리 시대의 ‘자산어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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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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