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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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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등록 2023-09-22 20:31 수정 2023-09-29 17:34
2007년 몽골 울란바토르 초원. 네가 죽어도 산 것은 산다. 네가 죽어야 산 것이 사는 것일까.

2007년 몽골 울란바토르 초원. 네가 죽어도 산 것은 산다. 네가 죽어야 산 것이 사는 것일까.

언젠가 이렇게 썼다.

“어떤 사진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을 찍는 과정마저 아름다웠을 거라 여기는 건 아프다.”

우리는 또렷하고 선명한 시선으로 사진을 바라보지만, 안타깝게도 사진을 통해서 ‘사진의 전후’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사진으로 뭔가 보여준다는 건, 뭔가 가리고 보여준다는 말과 같으니까. 사진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베어낸 박막에 불과하다.

자그만 아기 새들이 둥지 밖으로 걸어 나와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은 채 어미 새를 기다리고 있다. 찰칵! 얼마나 귀엽고 아름다운가. 선명한 ‘시야 확보’를 위해 포식자로부터 둥지를 숨겨준 덩굴과 나뭇잎이 제거됐으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아기 새들의 발이 강력본드로 고착됐다는 ‘과정의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조류전문가이자, 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며, 기업 대표인 그분은 논란이 일자 “생태로 생각하지 말고 사진예술로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라고 답했다. 제목을 왜 <새의 선물>이라 지었을까. 살아 있는 죽음으로 포장한 선물이라니. ‘욕망의 산물’이라 짓는 게 나았으련만.

이제 이렇게 고쳐 써본다.

“어떤 고기가 맛 좋다고 해서, 그것이 식탁에 오르는 과정마저 좋았을 거라 여기는 건 슬프다.”

우리는 본능과 맛으로 고기를 입에 넣지만, 고깃덩어리로 그 생의 전후를 파악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고기가 우리에게 전체로 오지 않고 해체(된 특정 부위)로 온다는 점은 마음의 무게를 한결 덜어준다. 고기는 우리의 건강과 입맛을 위해 희생된 걸까. 이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일일까. 어디까지 자연스러워야 정당할까. 혹은 어디까지 정당해야 자연스러울까. 주저 없이 ‘고기의 선물’이라 말해도 괜찮을까.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1923~2015)의 책 <희생양> 표지에는 네 발이 한데 묶인 채 모로 누운 어린 양이 그려져 있다. 양은 곧 죽을 것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지라르는 인간문명사의 진정한 ‘결정’들엔 모두 ‘희생양 제의’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라틴어 ‘결정하다’가 ‘희생양의 목을 자르다’에서 비롯됐음을 지적하면서. 물론 그가 말하는 희생양이 동물만은 아니다. 힘센 자와 힘센 가치와 힘센 논리는 결정의 힘을 가진다. 희생자를 결정짓는 힘.

양이 죽어 누워 있다. 울타리 안에선 살아남은 양들이 각자의 본능과 의무를 향해 풀밭으로 뛰쳐나가길 기다리고, 울타리 밖에선 죽은 양의 털과 가죽을 벗긴 뒤 부위에 알맞은 요리를 하려고 사람들이 분주하다. 손님이 묻는다. 저 양은 죽은 것인가, 죽인 것인가. 그런 뒤 어떻게 요리할지 더 자세히 묻는다.

불현듯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떠올랐다. 죽은 엄마를 둘러싸고 15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입장에서 59개의 이기적인 진술을 이어가는 부조리 소설.

죽을 것이 죽는다면, 산 것은 살아야 하는가.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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