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아닌데도 나는 밭에서 일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
본업이라면 사진 담고 글 쓰는 일이지만, 둘을 합해도 밭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짧다. 어떤 날엔 밭에서 하루를 열고 닫는다. 농사를 배우려 먼 기술센터를 오가며 수업을 들었다. 유튜브를 뒤지며 발아와 성장, 거름주기, 가지치기, 열매 맺기, 겨울나기 따위도 공부했다. 관측 사상 가장 무더웠다던 올여름엔 “제발 낮에 밭에서 일하지 말라”는 이장님 방송을 한 귀로 흘려듣고 온몸 푹 젖을 때까지 일했다. 얼마나 땀을 흘렸느냐면, 아침저녁 몸무게가 다를 정도였다. 마을에서도 나는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면 뭐 하나. 건지는 게 없다. 수확이 거의 없다. 추수(한 뒤) 감사(하고) 절(할 일)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나 싶다. 요즘은 농사도 사업이고, 투자와 수입이 함께 간다는데, 나는 농사에 돈을 쓰지 않는다. 기계와 동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맨몸으로 일한다. 기후와 날씨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를 짓지도 않고, 잡초 억제용 비닐 멀칭도 꺼린다. 레이첼 카슨의 책 ‘침묵의 봄’을 읽은 탓일까. 제초제와 살충제를 쓰는 게 그리도 마음에 걸린다. 고상하지만 멍청한 짓을 다 하고 나니 남는 게 없다. 누굴 탓하랴.
유혹이 있었다. 농기계를 사거나 시설을 지으려 작심하면 지원을 빙자한 대출이 손짓할 것이었다. (빛이 아니라 빚이 아닌가.) 요즘 합성비료와 제초제·살충제는 ‘스마트폭탄’처럼 살릴 건 살리고 죽일 것만 죽일 만큼 똑똑하(다고 한)다. 하나 결코 싸지 않다. (하물며 생태계 누적의 멍에를 피해가는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데, 밭에서 일하는 시간만 늘다보니 그저 멍청이 농사꾼이 되고 말았다. 슬프다.
적은 또 있었다. 동물이었다.
5년 전, 산골 비슷한 데 살 때 마을 어르신이 기력이 쇠해 더는 못 부치겠다며 던져준 너른 밭이 있었다. 부부가 온 힘 다해 밭을 갈고, 돌을 캐고, 고구마를 심었다. 쇠기둥 박고 고라니망도 쳤다. 추운 겨울 따스할 군고구마를 상상하며. 시작은 좋았다. 무성하게 자랐다. 거기까지. 어느 새벽 들이닥친 멧돼지가 반년 농사를 무위로 돌리는 데 몇 분이 필요했을까. 똑똑한 고라니는 막 나온 콩잎만 알차게 따 먹는 바람에 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영리하고 충실한데, 우린 어눌하고 게을렀다.
같은 ‘박’인데 덜 익어도 잘 익어도 좋은 호박과 달리, 수박은 까다로워 번번이 실패했던 녀석이었다. 바닷가로 내려와 살며 올해 처음 두 개를 잘 키워 언제 따 먹을까 저울질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놀러 온 날 자랑삼아 대접하려 밭에 갔더니 난도질돼 있었다. 까마귀였다. 잘 익은 수박을 나만 기다린 게 아니었다. 마침 전봇대에 앉아 있었다. 부아가 치밀어 돌을 던졌지만 맞긴커녕 가래침 뱉는 소리만 돌아왔다. 카악~ 카악~.
때란 무엇인가. 내 기다리던 걸 너도 기다렸구나. 반쯤 남은 걸 따와 도려낸 뒤 친구와 나눠 먹었다. 너희가 아는 것, 까마귀도 안다 경고하며.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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