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대학은 경기도에 있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 있는 직행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학교에 가기 싫으면 터미널 근처 예술의전당으로 갔다. 지금은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 전시실로 바뀐 1층 자료열람실에서 하루 종일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글도 썼다. 누군가와 공유해 뭔가를 만들 수 있는 무대라는 공간에 참 간절히 끼어들고 싶던 시절이었다. 그런 내게 예술의전당은 보물섬이었다. 가난한 대학생이던 나는 극장에 자주 가지 못했다. 극장에 가서 무대를 보는 대신 그곳에 앉아 희곡을 읽고 팸플릿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희곡도 많았고, 연극 관련 팸플릿은 정말 많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팸플릿과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본 적도 없는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가 저절로 떠올랐다. 실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무대에 섰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상상 속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뜨거움을 상상하다보면 내 마음도 늘 충만했다.
어떤 날은 용돈이 떨어졌는데 학교에 갈 차비를 달라고 말하는 일이 자존심 상해 학교 대신 예술의전당에 가기도 했다. 자판기 커피 한잔 살 돈과 지하철 요금만 든 주머니로 앉아 있었지만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뭐가 되지 않아도, 뭐가 될지 알 수 없어도, 무언가를 향해 끝없이 달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고 기쁘고 또 행복했다.
가끔 A를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A는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무용을 배우겠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부터 자신의 꿈이 무용수였다는 것이다. 꿈은 줄곧 그랬을지 몰라도 무용은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친구였다.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3학년에 한해 예체능대 진학반이 있었지만, 예고 진학에 실패했거나 관련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며 공부냐 예술이냐를 놓고 저울질하다 늦게 진로를 택한 친구들이 속한 반이었다. A처럼 배워본 적도 없는 꿈에 도전한 친구는 없었다. A의 선언을 그저 치기로, 과한 농담으로 여겼던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A는 아빠가 없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와 여동생과 살았다. 사는 형편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예능 교육에 투자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도 웃었으니 A의 엄마는 당연히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A는 정말로 무용을 시작했다. 강습비가 가장 저렴한 무용교습소를 찾았고, 강습비를 내기 위해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잠이 많은 A는 1학년 내내 지각을 했다. 그런 A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린다고 했다.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무섭다고 했다. 새벽빛이 다 밝지 않은 골목에 불쑥 장정의 그림자라도 나타나면 일단 죽어라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A는 그 어느 때도 본 적 없는 행복하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A는 결국 무용과에 갔을까. 모르겠다. 학력고사가 끝난 이후 A를 만나지 못했다. 그 뒤의 삶이 어떠했든 나는 그날의 A가 누구보다 행복했을 거라고 믿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을 만나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졸업 시즌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 입학 시즌이다. 진학하는 사람도 있고, 진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갈 곳이 있는 사람도, 갈 곳이 없는 사람도 있겠다. 모두가 원하는 길에 놓일 수는 없겠지만, 원하는 것도 없는 삶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부디 모두들 건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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