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서거 직전까지 ‘독재자’라는 표현을 써가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지만, ‘평생 민주화 동지’로 여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사람의 인연은 1997년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5년 정계 복귀 이후 민주당에서 분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 뒤였다. 당시 민주당은 1990년 1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민정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했을 때 합류하지 않은 ‘꼬마 민주당’과 김 전 대통령의 신민당이 1991년 통합해 만든 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분당 국면에서 새정치국민회의에 곧바로 합류하지 않는다. 분당은 야권 분열만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DJ와 선긋기’ 거부한 노무현하지만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 때부터 정치적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제정구·이부영·이철 전 의원 등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후신 한나라당에 투항하자,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3당 합당의 후예보다는 정권 교체와 동서 통합의 명분을 지닌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이 낫다고 봤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 정치적 비주류였던 그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해 행정 경험을 쌓도록 해줬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는 노 전 대통령을 보이지 않게 지원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단 한 번도 배반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다. “물론 제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선을 그으며 어떤 공격적 정치 행위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개혁이 안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사실 개혁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거에서 표를 얻을 수가 없을 뿐이지요. 사실 그게 우리의 고민입니다.” 2002년 6월25일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내놓은 발언이었다.
같은 해 3월 광주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정치적 아이콘으로 떠오른 노 전 대통령이지만,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선 후보로 결정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 사건이 차례차례 터지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당선은 고사하고 후보 자리를 유지하기도 힘겨워 보였다.
정치권과 언론은 그에게 ‘DJ와의 차별화’에 대한 입장 표명을 사실상 강요했다. 부패한 정권으로 낙인찍힌 국민의 정부와의 선긋기에 나서라는 요구였다. 심지어 당시 노 전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도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그때마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만큼만 정치를 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라며 차별화를 거부했다. “(김 전 대통령은) 철학이 있는 유일한 지도자였다”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명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사건이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이다. 2003년 초 시작된 대북송금 특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2004년 총선 직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호남의 분열을 촉발했다.
현실적 한계 때문에 받아들인 특검두 사건을 고리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애증의 관계’로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다. 참여정부 시절 초대 의전비서관을 지낸 서갑원 민주당 의원은 “언론에서 보는 것처럼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사태가 두 전직 대통령의 신뢰 관계에 결정적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며 “대북송금 특검이나 민주당 분당이 노 전 대통령의 의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김 전 대통령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받아들인 것은 2003년 3월15일이었다. 하루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이 문제를 놓고 청와대 참모진 회의와 국무회의를 거듭했다. 대북송금 특검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의 심정은 이진 전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이 쓴 에 소개돼 있다. 특검안 수용 여부가 논의된 최종 국무회의에서 정세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한명숙 환경부 장관, 지은희 여성부 장관 등 거의 모든 국무위원은 수용 거부를 건의했다. 은 국무회의 장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국무위원들과 눈을 맞추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용을… 하십시다.’ 순간 정세현 장관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돌았다. 노 대통령은 정 장관을 보며 말했다. ‘우리들 모두 통일부 장관께서 걱정하시는 문제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통일부에서 반대를 안 해주시면 직무유기입니다. 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참여정부 핵심 관계자는 “당시 노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면서도 한나라당의 특검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수 여당 출신 지도자로서의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며 “이 일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방문해 경위를 설명드리겠다고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전례는 없었다’며 사양해 청와대 회동으로 대신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은 4월22일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물론 이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사태에 대한 섭섭함을 내비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 개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된 박지원 실장 등에 대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민주당 관계자는 “두 전직 대통령 사이에 오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선택이 당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항력적이었다는 현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옳은 건 옳은 것, 당당하게 나갑시다”표면적으로나마 잠시 갈등 관계로 비쳤던 두 전직 대통령 사이의 관계가 다시 완전히 회복된 계기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경제·복지 정책에서도 국민의 정부와 철학을 함께했지만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노 전 대통령 스스로 햇볕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노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아 회담 성과를 설명한 사람도 김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찾은 김 전 대통령은 “1차 정상회담 때 뿌린 씨앗이 크게 성장했다”며 “우리 민족에게 다행스러운 일이고 노 대통령이 재임 중 큰 업적을 남겼다”고 치켜세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나하고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전생에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형제간”이라고도 했다. ‘닮은 점’에 대해 노 전 대통령 본인이 밝힌 적도 있다. “선거전이 불리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옳다고 주장했던 것까지 뒤엎어야 합니까? 우리에게 불리한 거지만 또 옳은 건 옳은 게 아닙니까. 당당하게 나갑시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 에서 소개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이다. 1992년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하던 ‘국민연합’이 보수 진영으로부터 좌경용공으로 공격당하자 민주당 안에서 ‘선긋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던 때 김 전 대통령이 보인 반응이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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