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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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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능력주의’ 보게 하라

메리토크라시 개념 만들어낸 마이클 영의 1958년 소설…불평등 심화, 엘리트 계급의 대중 멸시 등 놀라울 정도로 꿰뚫은 ‘미래’ 모습
등록 2024-01-20 14:32 수정 2024-01-24 09:41
영국 런던의 한 학교에서 GCSE(중등교육일반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모습. REUTERS

영국 런던의 한 학교에서 GCSE(중등교육일반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모습. REUTERS


‘능력주의’(meritocracy)는 지지와 반대가 갈리는 정치체제입니다. 모두가 지지하는 민주주의(democracy)나 대부분 반대하는 귀족주의(aristocracy), 금권주의(plutocracy) 등 다른 ‘크라시’들과는 달리 찬성과 반대 입장이 다 강력합니다. 또 이 개념은 등장 방식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문학작품이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개념을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그 반대로 소설이 사회과학적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능력주의’라는 단어는 1958년 발표된 마이클 영의 소설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영은 탁월함, 자격 등을 의미하는 merit와 권력을 뜻하는 cracy의 합성어를 만들어 ‘능력에 따라 권력이 배분되는’ 또는 ‘능력이 사회 운영 체제를 좌우하는’ 세계를 소설에서 펼쳤습니다.

입학시험과 종합학교 도입 운동까지는 역사소설

소설의 배경은 2034년 영국입니다. 주인공인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열렬한 능력주의의 옹호자입니다(현실의 영은 반대로 능력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는 입장입니다). 그는 그 전해 5월 발생한 대중 봉기에 대한 연구에 착수합니다. 포퓰리스트가 주도한 이 봉기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1870년부터 2033년까지 영국의 사회사를 파헤칩니다.

분석의 출발점 1870년은 영국에서 처음 초등교육이 의무화됐고 공직자 임용에서 정실주의가 아닌 경쟁 선발이 시작된 해입니다. 귀족주의 전통이 강했던 당시 영국 지도층이 격렬히 반대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능력과 교육이 따로 놀았습니다. 정부에서 사무관 역할을 할 자질을 갖춘 아이가 연줄이 없어서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해 우체부가 되거나, 능력이 형편없는 아이가 부모 ‘빽’으로 고위 외교관이 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영은 개탄합니다.

1944년 양질의 인력이 부족해 대외 경쟁에서 영국이 뒤처진다는 위기감은 또 다른 교육개혁에 불을 지폈습니다. 5~11살 초등교육과 12~15살 중등교육(국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한 개념입니다)의 분할이 도입됐습니다. 초등교육을 마치고 입학시험을 치러 좋은 성적을 받은 소수 아이는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그래머스쿨로 진학하고, 나머지 대다수 아이는 일반 중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이후 ‘11 플러스’라고 불리는 입학시험으로 아이들의 운명이 갈리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와 상류층과 하류층,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분 등에 대한 비판이 일었습니다. 입학시험을 통한 중등학교의 학생 선발을 폐지해서 엘리트/비엘리트 중등학교의 구분을 없애라는 주장이 퍼졌습니다. 종합학교 도입 운동입니다. 현실의 마이클 영은 종합학교화를 적극 추진한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 목소리는 거셌습니다. 심지어 사회당 안에도 ‘귀족 집안 여부나 빈부를 떠나 능력 있는 아이를 선발해서 교육하는 것이 곧 평등’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가 20세기 중반까지 일어난 일로 역사소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똑똑하다고 고위층 된 것이니, 입 닥쳐”?

작가는 종합학교 도입을 통한 교육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가상의 마이클 영을 내세워 종합학교가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풍자에 나섭니다. 여기서부터 미래소설입니다.

소설에서 영국은 실제와 달리 종합학교 안을 폐기하고 명문 그래머스쿨 체제를 강화합니다. 신분과 부의 세습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여 상속세와 자산세를 강화하고 엄격한 입학시험을 수행합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지능이 높으면 문제없이 그래머스쿨에 입학합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부잣집 아이들을 위해 부모는 온갖 편법을 쓰지만 용이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위계가 엄격하게 능력에 따라 재구성되자 패자들의 목소리가 약해졌습니다. 귀족제였다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공격하고, 금권제였다면 ‘부자만 다 해처먹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비난하겠지만, 능력제 아래에선 어떻게 대응할지 막막합니다. ‘똑똑하다고 고위층이 되는 게 말이 되냐’고 비판하기엔 뭔가 옹색합니다.

능력주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확산합니다. 그래머스쿨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조국의 미래가 달렸다는 이유로 엘리트 학생들에게 노동자보다 더 많은 급여를 주기 시작합니다. 영재를 조기에 찾겠다며 선발시험을 보는 나이를 점차 낮추다가 급기야 태어나자마자 판정하게 됩니다. 우생학을 포함한 최첨단 과학을 동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모든 중요한 지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불만이 저절로 사그라들지는 않습니다. 대중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고 2005년 모든 피고용인에게 균등급을 지급하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세분화된 보상 체계를 통해 엘리트들은 막대한 소득을 가져갑니다. 능력주의자들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지만, 2023년 여성이 주도한 진보적 포퓰리스트의 봉기로 역사의 분기점에 서게 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두 가지에 놀랐습니다. 우선 1958년에 어떻게 이토록 정확하게 미래를 꿰뚫어봤을까 하는 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전개된 능력주의 옹호의 강력한 논리는 국가경쟁력 제고였습니다. 또 능력주의는 20세기 후반 진보 진영에 강력하게 확산했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는 취임사에서 우리 모두는 능력주의자(meritocrats)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영은 이 연설에 화나서 블레어를 비판하는 글을 <가디언>에 발표했습니다). 또 ‘메리토크라시’에 따른 불평등 심화, 엘리트 계급의 대중 멸시, 대중의 분노와 포퓰리즘의 발흥은 놀라울 정도로 소설 속 묘사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 균등급은 현실의 기본소득 자체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 능력주의자들은 기본소득의 중요한 지지자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가 기본소득의 지지자들

둘째, 영의 메리토크라시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지만 그의 소설 속 묘사는 단순하거나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찬성론과 반대론을 각각 최선의 형태로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서문 마지막 문장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독자의 몫이며, 다만 바람이 있다면 현대 사회의 커다란 쟁점 중 하나를 놓고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독자가 소소하나마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입니다. 저의 메리토크라시에 대한 입장은 유보적입니다. 다만 이 소설의 풍자는 버나드 쇼에 못지않은 최고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소설에서 생각거리와 재미를 같이 누리길 바라면서 추천해드립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는 


마이클 영은 1915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진보 정치인입니다. 런던정경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사회학 박사를 받은 학자이고, 한때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30대 초반에 영은 1945년 총선 선언문과 연설문 핸드북을 집필해 노동당의 압승에 기여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영국 최대 사회과학 연구기관인 ‘경제사회연구위원회’ 설립의 주역이며 초대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그의 대표작 <능력주의>는 출판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영국의 점진적 사회주의의 온상인 페이비언협회를 포함해 열 곳 넘는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뒤 겨우 출판됐습니다. 하지만 시대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이 책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12개 언어로 번역돼 수십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한글로는 2020년 유강은의 번역으로 이매진에서 출간했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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