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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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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몰락에 베팅하다… 2023년 퓰리처상 ‘트러스트’

20세기 초반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한, 2023년 퓰리처상 수상작 에르난 디아스 <트러스트>
등록 2023-05-12 12:44 수정 2023-05-16 05:36
1929년의 미국 뉴욕 맨해튼. <트러스트>의 무대는 경제적 붐과 공황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20세기 초반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이다. 위키피디어

1929년의 미국 뉴욕 맨해튼. <트러스트>의 무대는 경제적 붐과 공황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20세기 초반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이다. 위키피디어

에르난 디아스의 역사소설 <트러스트>의 무대는 경제적 붐과 공황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20세기 초반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영화 <라쇼몽>처럼 교대로 자신의 시선에서 진술하고, 독자는 입체적인 시대상을 얻을 수 있다.

돈의 뒤틀림에 매료된 남자

첫 파트는 해럴드 배너가 쓴 <채권>이라는 소설 속 소설이다. 미국 동부에서 가장 성공한 담배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벤저민 래스크는 가업을 상속한다. 하지만 번잡스러운 상거래는 내향적인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는 ‘자본이 자본을 낳고 그 자본이 또 자본을 낳는 돈의 근친상간적 계보’에 끌려 금융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보기에 ‘자본은 균 하나 없는 생물로 움직이고 먹고 자라고 새끼를 치고 병들며 죽을 수 있어도 깨끗한’ 존재다. 심지어 자신의 꼬리를 집어삼키는 신화 속 뱀 우로보로스처럼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는’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

벤저민은 1907년 경제위기 때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가격이 폭락한 여러 회사 주식을 헐값에 매수해 큰 이익을 내면서 뉴욕 금융계에 이름을 알린다. 1929년 대공황 때도 ‘벤저민은 아무 상처를 입지 않고 폭풍우 속을 항해한 것만이 아니라 그 폭풍우를 통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 주식시장 폭락의 징후를 느낀 벤저민은 보유한 금융자산을 미리 매각하고 금을 사들였으며 대규모 주식 공매도까지 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대중은 벤저민이 시장 붕괴를 설계했다고 믿었다. 그는 대중의 채권에 대한 무분별한 욕망에 불을 댕기고 소문을 퍼트리고 마침내 매도 대잔치를 벌여 공포를 확산시켜 주식시장과 수많은 사람을 망가뜨린 은둔의 괴짜로 묘사됐다. 상원은 공청회를 열어 벤저민을 출석시켰다. ‘취조자들은 불을 뿜으며 화려한 말을 쏟아냈지만, 벤저민이 한 행동 중 불법행위는 하나도 없었다.’

1933년 벤저민은 미국의 긴급은행법과 증권법에 의한 규제 강화가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달러화 폭락에 베팅해 영국 파운드화,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까지 매집하고, 다시 한번 미국 주식을 대규모로 공매도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시장은 붕괴하지 않았고 벤저민은 물러섰다. 금전적 손해도 컸지만 그의 명성은 더 많이 손상됐다. 대중은 벤저민이 미국의 몰락에 베팅한 것에 분노했고 그의 실패를 조롱했다.

에르난 디아스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이후 스웨덴, 아르헨티나, 영국, 미국 순으로 여러 국가를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소설을 단 두 권 발표했는데, 모두 20여 개국에서 번역될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문단에서도 호평받았다. 데뷔작 <먼 곳에서>(2017년)는 포크너상을 받았고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2022년 발표한 <트러스트>로 마침내 퓰리처상을 받았다. 국내에는 2023년 강동혁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됐다. 미국 <에이치비오>(HBO)에서 케이트 윈즐릿 주연의 티브이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에르난 디아스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이후 스웨덴, 아르헨티나, 영국, 미국 순으로 여러 국가를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소설을 단 두 권 발표했는데, 모두 20여 개국에서 번역될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문단에서도 호평받았다. 데뷔작 <먼 곳에서>(2017년)는 포크너상을 받았고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2022년 발표한 <트러스트>로 마침내 퓰리처상을 받았다. 국내에는 2023년 강동혁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됐다. 미국 <에이치비오>(HBO)에서 케이트 윈즐릿 주연의 티브이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소설 모델이 된 인물의 자서전

배너의 소설 속 벤저민이 금융계 거물 앤드루 베벨을 그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의 부모에 대한 왜곡된 묘사도 불쾌했지만, 암으로 죽은 아내를 정신질환자로 몰고 자신을 파렴치한 악마로 모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앤드루는 회고록을 쓰는데 이것이 <트러스트>의 두 번째 파트이다.

앤드루은 ‘금융업자는 모든 시기에 자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도시를 지탱해온 존재’라며 가업인 금융업에 자부심을 표하며 회고록을 시작한다. 증조부 윌리엄은 1807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어리석은 금수조치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선물계약, 채권 유통시장 수립과 국채 인수로 부를 일군다. 할아버지 클래런스는 예일대학 수학 교수를 제안받을 만큼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금융을 순전히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받아들였다. 개방적이고 활발했던 아버지 에드워드는 뛰어난 직관으로 1873년 경제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앤드루는 이 모든 자질을 이어받았다.

앤드루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질투하고 비난하지만, 자신은 금융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뛰어든 어중이떠중이 투기꾼들과 연방준비제도의 무절제한 간섭주의에 맞서 공매도를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큰 이익을 얻었지만 장기적으로 미국 전체가 시장의 해적질과 국가 간섭에서 해방돼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는 이기심과 공동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파트는 대필작가 아이다 파르텐자의 이야기이다. 아이다는 앤드루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회고록의 실제 저자다. 아이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노동운동가로, ‘돈이 뭐냐? 순전히 공상적인 형태의 상품이지, 돈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며 잠재적으로 모든 사물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돈이 허구라면, 금융자본은 허구의 허구’라며 금융자본을 비판한다. 그에게 돈은 상품의 신격화된 존재이며 월스트리트는 그 신의 최고 신전이다.

아이다는 금융자본을 경멸하는 집 딸로서 미국 최고 금융자본가를 위해 회고록을 쓰는 불편한 상황이지만 자기 일을 충실히 수행해나간다. 하지만 앤드루가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서 현실을 조정해서 자신에게 맞도록 구부린다’고 말하자 두려워한다. 앤드루는 배너의 소설 출판 중지 소송에서 패하자 아예 그 출판사를 사들여 배너의 책 유통을 막았고, 뉴욕의 공공도서관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는 것을 이용해 도서관에서 배너의 책을 사라지게 했다.

트러스트, 독점과 신뢰

이 시기 미국은 금융자본의 도움으로 거대 독점(트러스트)이 심화하고, 월스트리트는 모든 욕망의 초점이었으며 그중 대표적 기관 중 하나가 신탁회사(트러스트)였다. 소설 <트러스트>는 이 시기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활동 속에서 미국인 사이의 신뢰(트러스트)와 배신을 실감 나게 그린다. 특히 당시 금융에 대한 묘사는 업턴 싱클레어나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작품들을 완전히 넘어설 정도로 충실하다.

이 소설은 대표적인 금융소설이지만 거기에 갇히지 않는다. 인간의 오만과 허영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젠더 이슈도 흥미롭게 다뤘다.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앤드루의 아내 밀드레드의 일기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금융에 초점을 맞추고 또 짓궂은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부분만은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면 또 하나의 깜짝 놀랄 반전이 있을 것이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로 읽는 경제학: 일반인은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경제와 금융 종사자는 소설에 매력을 느끼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글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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