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일단 1차 기획안 서류가 통과됐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다. 프레젠테이션(PT)이 남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디자인 취향을 가진 상사들이 빨간펜을 들고 호시탐탐 당신의 발표 자료를 노리고 있다. “김복종씨, 발표 자료 다 됐으면 빨리 가져와봐요.” 상사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복종씨의 발표 자료를 스캔한다. 수정 사항이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배경 템플릿이 좀 밋밋하지 않아? 아, 참 빨간색은 촌스러우니까 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난 보라색 안 좋아해. 이거 참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네. 다시 해와요.”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까요?” “그건 복종씨가 알아서 해야지 말이야. 얼른 가봐.”
자리에 돌아온 복종씨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수정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기분이다. 그렇다. 그놈의 ‘똥개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결재 라인에 딱 버티고 있는 빨간펜 상사가 한둘이 아니고 그들의 디자인 취향이 또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이런저런 디자인 수정 지시를 무조건 따르던 복종씨는 졸지에 무능력한 실무자로 찍혀버렸다.
회사에서는 PT 컨설턴트 나주관씨를 초빙했다. 발표 자료를 디자인하기 전에 주관씨는 묻는다. “누가 발표합니까?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입니까? 청중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며칠 뒤 완성된 PT를 갖고 주관씨가 왔다. 역시 빨간펜을 든 상사들이 도끼눈을 하고 발표 자료를 스캔한다. 잠시 뒤, 세계적인 디자이너 앙드레김 선생님으로라도 빙의된 듯 저마다 취향에 따른 수정 사항을 쏟아낸다.
“전문가라고 하더니 스타일을 그렇게 모르시나요? 너무 밋밋하잖아요. 어휴, 여기 빨간색은 왜 쓴 겁니까? 복종씨가 만든 것보다 깔끔하긴 한데 아직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많네요.” 세계적인 디자이너 10명이 열변을 토하자 회의실이 시끌시끌해졌다. 이때 주관씨가 한마디 한다. “사장님께서 원한 스타일입니다. 물론 청중에게도 맞게 최적화했습니다.” 순간 회의실에 정적이 흐른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는 사라지고 직장인들이 돌아왔다. 팀장이 머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군요. 디자인 참 좋네요. 이걸로 추진합시다. 소신도 있고 역시 멋집니다.” 그날 주관씨는 복종씨의 영웅이 됐다.
PT를 준비할 때 가장 짜증 나는 일은 이 사람 저 사람이 훈수 두듯 한마디씩 잔소리하는 것이다. 정말 끝도 없다. 그래서 발표자는 무한 똥개 훈련과 야근이 당연하다고들 체념한다. 하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초반부터 최고 결정권자와 청중의 스타일에 맞는 디자인을 선택해 밀어붙이는 것이다. 참 쉽지 않은가. 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데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제 진리를 터득한 당신은 똥개 훈련에서 자유로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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