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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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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회피와 창조경제

등록 2013-06-20 19:50 수정 2020-05-03 04:27

세금을 전혀 물리지 않거나 세율이 극히 낮은 역외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설립한 국내 저명인사들의 명단이 잇달아 공개되고 있다. 비영리 탐사보도 온라인 매체 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따른 결과다. 현재까지 관련 사실이 드러난 사람만 해도 재벌 총수에서 교육·문화계 인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한때 ‘주식투자의 귀재’로 불렸으나, 주가조작 등의 혐의를 받자 해외로 도피해 기소 중지된 상태에 놓여 있던 인물도 명단에 포함돼 눈길을 끈다. 때마침 검찰이 범삼성가의 종갓집이라 할 수 있는 CJ그룹을 상대로 일전을 치르는 점도 세간의 관심을 붙들어매는 효과를 톡톡히 내고 있다. CJ그룹 본사와 경영연구소는 물론, 이재현 CJ그룹 회장 자택까지 압수수색에 나선 검찰은 CJ그룹이 역외 지역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가 탈세와 비자금 조성 등 각종 범죄행위를 밝혀줄 실마리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최근 사태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란 아직 너무 이르다. 그간 풍문으로만 떠돌던 유력자들의 ‘조세회피’ 실체가 이제 겨우 한 꺼풀 벗겨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외 지역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곧장 법적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면, 국내 재벌과 저명인사들이 보여준 행태에서 눈길이 가는 대목이 적잖다. 무엇보다 조세회피처를 ‘창조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CJ그룹을 비롯해 이번에 명단이 공개된 일부 재벌 총수들에게 역외지역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의 용도는 단순히 사업으로 벌어들인 소득에 따라붙는 세금을 피하거나 줄이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조세회피처란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오히려 변방으로 내몰린 셈이다. 최근 미국의 애플사가 세금 부담을 피할 요량으로 조세회피처로 꼽히는 아일랜드에 1천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곤혹을 치르는 것과도 구별되는 대목이다. 얼마 전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상원 상임조사소위원회에 출석해 미국 세법의 불합리성을 지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반해 국내 재벌 총수들에게 조세회피처란 일종의 ‘투자전략본부’로 격상된 듯한 분위기다. ‘비자금 조성→국내 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총수 지분 확대 및 편법·불법 승계’라는 역동적 과정의 핵심 고리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소극적·경제적 의미의 조세회피 차원을 넘어, 적극적이고 다분히 전략적인 조세회피에 나섰다고나 할까. 이 모든 과정의 밑바탕을 이루는 동력은 바로 국내 재벌체제의 대표적 특징인 지배구조의 후진성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내고 기업경영을 혁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총수 일가를 정점으로 하는 후진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키고 편법·불법으로 부를 대물림하는 데 창조성이 극적으로 발휘된 건 여러모로 역설적이다.
더욱 씁쓸한 건, 이번에 공개된 사례 역시 빙산의 일각에 그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이다. 업계에선 버젓이 실명으로 역외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건 하수 중의 하수들이나 하는 바보짓이라는 비아냥마저 나돈다. 실제로 재무 컨설팅을 담당하는 업계의 ‘선수들’ 사이에선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국내 자금을 빼돌린 뒤 차명계좌로 다시 돈을 옮겨놓고 그 페이퍼컴퍼니는 폐쇄하는 식의 방법으로 흔적 지우기에 나선 사례가 훨씬 많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제 겨우 한 꺼풀 벗겨지기 시작한 조세회피처의 실상 앞에서,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분노를 쏟아내는 건 분명 시기상조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은 아주 멀다.



* 정은주·박현정·서보미 기자가 952호부터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한 기획 연재 ‘무죄와 벌’ 시리즈가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뽑혔습니다. 세 기자에겐 축하와 격려를, 독자들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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