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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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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성장의 걸림돌?

강한 노조는 임금 인상보다 장기적 성장에 관심… 자본이 유연해져야
등록 2009-09-17 17:43 수정 2020-05-03 04:25

완전한 자유경쟁 시장이 항상 경쟁적 균형과 최적의 효율을 달성하고 모든 사람들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시장주의의 지독한 믿음은 뿌리가 깊고 견고하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복음처럼 여기는 밀턴 프리드먼의 ‘당구 게임’ 비유를 보자. “우리가 당구를 칠 때 정교한 물리법칙에 따라 각도와 속도를 계산하면서 최적 경로를 찾아 게임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플레이하는 방식은 물리법칙의 해답과 거의 일치한다.” 즉, 시장에 참여하는 경제인들은 합리적인 선택과 의사결정을 하고, 시장은 항상 효율성을 보장한다는 이른바 ‘시장효율성 가설’이다. 이는 시장에 개입하는 제도는 어떤 것이든 나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더 강한 노동’은 경제성장의 ‘유익한 제약’이다. 지난 6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비정규직법 개악안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더 강한 노동’은 경제성장의 ‘유익한 제약’이다. 지난 6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비정규직법 개악안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시장원리를 강조해온 경제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시장을 규제하는 각종 제도들, 특히 노동시장 제도에 대해 ‘경직성’이란 딱지를 붙이고 공격해왔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오랜 논란은 ‘시장과 제도’ ‘경직성과 유연성’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시장원리를 강조하는 쪽은 노동시장을 규제하는 각종 제도(정규직·비정규직 보호 제도)를 없애 유연성을 높이면 지금보다는 많은 고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해고 절차가 복잡하고 요건이 까다로우면 경기가 좋은 시절에도 기업은 고용을 늘리지 않을 것이며,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일자리를 다시 찾을 가능성도 커져 실업도 줄어들게 된다고 주장한다. 당구 게임이 보여주듯, “유연한 노동시장이 노동자들에게도 좋다”는, 규제 없는 노동시장이 자본과 노동 모두에 최적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시장주의적 성장이론은 궁극적으로 성장이 경쟁력에 의존하고, 경쟁력은 주로 노동비용 통제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따른다. 노조의 힘 때문에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노동비용이 높아지고 결국 노조가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물론 노동조합은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제도적 기구다. 칼 폴라니가 갈파했듯, 만물이 상품화되는 등 무한 팽창하는 시장으로부터 사회가 자기 보호를 위해 만든 제도 가운데 하나가 노동조합이다. 제도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노동조합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강한 노조가 자본에 ‘제약’으로 작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유익한 제약’이 된다. 왜 그럴까? 강한 노조는 오직 저임금에 기초한 가격경쟁을 하는 ‘임금 따먹는 착취형 공장’을 차단한다. 진정한 노조는 조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계급 내 임금 불평등을 초래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사실 높은 임금 수준이 유지되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업은 노동비용 외의 비가격경쟁 전략을 펴야 한다. 즉,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높은 임금은 기업이 노동자에 대한 교육·훈련에 더 기꺼이 투자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특히 고용이 안정되면 노동자들은 더 헌신적으로 일하고 작업장에서의 기술 변화도 상대적으로 쉽게 수용하게 된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과 삶 속에서 노동자 스스로 헌신적으로 일할 맛이 날까? 노조를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해고의 두려움이 없어지면, 노동자는 기업의 장기적 성장과 이에 따른 혜택이라는 더 크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당장의 임금 인상이라는 단기적 이해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1970~80년대 일본적 성장의 비결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신뢰에 기초한 고용관계’다. 평생고용 체제 아래서 자본은 노동을 단순히 생산요소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자부심을 느끼는 그 무엇으로 생각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강한 노조일수록 전투적 성향을 띠기보다는 오히려 임금 인상 자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 쪽을 보면, 고용 안정 등 부과되는 제도적 경직성을 보상하려고 스스로 내적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즉,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참을성을 갖고 장기적인 투자를 하는 ‘인내심 있는 자본’이 된다. 노동과 자본 모두 기회주의적 행동에서 벗어나게 된다. 경제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제도적으로 뿌리내린 강한 노조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의 한 원천으로 작용하는 독일과 스웨덴 모델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고용 규제는 성장의 장애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른바 노조의 나쁜 영향(임금 인플레이션, 실업 증가, 무역적자 등)에 대한 강력한 증거는 없다. 노동시장 불평등은 노동조합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기보다는 규제되지 않는 노동시장의 산물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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