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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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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도 뽑지 말라는 부자 거위

자유시장 외치면서 정부의 감세 요구하는 부자들의 이중성
등록 2009-10-23 19:35 수정 2020-05-03 04:25

근대적 의미에서 ‘국가’라는 기구는 세 가지 독점적·배타적 권리를 누린다. 군대·경찰 등 폭력적 국가조직를 보유할 수 있고, 독점적인 화폐 발행권이 있으며,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주권자들로부터 부여받고 있다. 시장근본주의 이론을 설파하는 경제학 교과서는 대부분 세금을 비효율을 낳는 주범으로 취급한다. 시장주의자들은 ‘정부 없는’ 이상적인 완전경쟁 시장을 모든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소비·이윤 극대화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효율적인 시장으로 묘사하는데, 이런 시장에 세금이 개입되면 소비자 잉여가 줄어들고, 민간경제가 위축되고, 따라서 비효율을 낳게 된다고 설명한다.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오른쪽)이 지난 10월13일 전경련 경제정책위원회에서 현재현 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오른쪽)이 지난 10월13일 전경련 경제정책위원회에서 현재현 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

정부 소득과 지출의 원천인 세금을 줄여주는 감세 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운용에서 핵심 기조다. 규제 완화 못지않게 거두는 세금의 크기가 작아야 ‘작은 정부’를 달성할 수 있다. 자유시장 이론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은 언젠가 에 연재한 칼럼에서 “나는 정부 지출의 폭발적 증가를 막을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언제, 어떤 이유, 어떤 방식으로든 조세를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유한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그러므로 감세를 환영하라”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어떤 이유로 감세를 환영하고 있는가?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정부 기준에 따라 과세표준(세금을 부과하는 기준금액) 8800만원 이하를 중산·서민층으로 정하고 계산했을 때 2008년과 올해 중산·서민층 1인당 감세액은 120만원인 반면, 고소득층 7만 명에게는 1인당 4034만원이 감세 혜택으로 돌아간 것으로 집계했다.

시장주의 공급중시 경제학은 감세를 하면 부자와 기업들이 각각 더 많이 소비하고 생산해 고용이 늘고, 저소득층과 경제 전반에 온기가 골고루 퍼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시장주의자들의 가르침인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다.

하지만 이는 그럴듯한 논리에 불과하다. 부자들은 감세로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도 소비를 늘리기보다는 증가한 소득을 저축하거나 장롱 속에 집어넣기 마련이다. 과세는 흔히 ‘거위를 울지 않게 하면서 깃털을 뽑아내는 기술’이라고 하는데, 감세는 거위를 울리기는커녕 더 즐겁게 해줄 뿐이다. 물론 세금이라는 털을 뽑아낼 수 있는 거위는 깃털이 많은 부자 거위들뿐이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과세 미달로 면세받는 임금소득자가 2007년 562만7천 명(42.1%)에 이른다. 즉, ‘부자 감세’란 말은 전혀 놀랄 만한 말이 아니다.

대표적 시장주의자인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스스로 최근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고 하는데 환율 효과와 재정지출 효과를 빼면 창업 이래 최대 적자”라고 말했다. 시장의 효율적인 작동이 아니라, 각종 감세와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등 ‘국가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는 얘기다. 겉으로는 국가의 간섭이 없는 ‘자유기업’을 주창하면서도 사실 기업들은 정부 규제를 즐긴다. 규제가 그들을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무능한 자본일수록 ‘더 많은 특혜와 규제’를 위해 국가에 로비한다. 규제받는 자들이 규제하는 자들을 포획해 이용하는 것인데, 언젠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기업들에 더 많은 (감세 등) 특혜를 달라. 그래야 신규 투자를 해서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투자를 회피하는 ‘자본 파업’을 앞세워 정부를 압박한 것이다. 감세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세금 납부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준조세로 불리는 각종 사회보장 지출(국민건강보험 등)을 보면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이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환영받을 대상임은 분명하다. 소득이 낮은 사람은 건강·영양 상태가 상대적으로 더 나쁘고, 더 자주 병원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더 적은 보험료를 내고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그 유명한 ‘공짜 점심’ 신화를 언급하면서 “정부가 어느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돈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신화에 불과하다. 기업은 지하실에 화폐 발행 윤전기를 갖고 있지 않다. 기업이 정부에 세금을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짐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프리드먼의 말은 정확하게 맞는다.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로 인해 막대한 재정적자가 예상된다. 재정수지를 맞추기 위해 앞으로 정부는 저소득층에게서도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될 것이다. 2007년에 42%에 달했던 중·하위 소득층의 면세자 비율도 크게 줄어들 것이 뻔하다. 반면 고소득층은 지금 누리는 감세 혜택분을 나중에 다시 뱉어내면 그만이다. 부담을 떠안게 될 사람은 거위 털을 느닷없이 요구받게 될 중·하위 소득자들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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