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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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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 늘어나는 고장난 노동시장


사내하청 횡행하면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이 정리해고 컨설팅·하청노동 공급 업체로 흘러 들어가
등록 2010-02-04 15:36 수정 2020-05-03 04:25
1월21일 청와대에서 제1차 국가고용전략회의가 열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월21일 청와대에서 제1차 국가고용전략회의가 열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바야흐로 지금 한국 경제는 ‘고용’이 최대 화두다. 사상 최초로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국가고용전략회의’가 열렸다. ‘사실상의 실업자’가 300만 명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자 노동부는 취업준비생, 가사육아 담당자, 단시간 근로자 중에서 취업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포함한 ‘취업애로계층’이 182만3천 명(실업자 88만9천 명 포함)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경제원론 교과서는 만약 최저임금 같은 제도적 개입이 없다면 정해진 시장 균형임금 수준에서 (자발적 실업자를 빼고) 노동시장은 ‘완전고용’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일반적인 상품시장과 달리 다양한 측면의 사회·경제적 제도의 맥락 속에서 작동한다. 다소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지만, 사내하청·시설투자·대학진학률·등록금 등 여러 측면에서 한국의 노동시장이 돌아가는 판을 살펴보자. 이런 요인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고용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168만 명 중 36만8천 명(21.9%)이 사내하청 노동자다. 대표적 ‘간접고용’ 형태인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특징은 ‘중간착취’에 있다. A기업은 월 200만원 받던 정규직 노동자 김씨를 내쫓아 비정규직화하고, 쫓겨난 김씨는 B라는 사내하청 업체로 재입사한다. 이때 원청인 A기업은 B사와 하청노동자 1인당 150만원에 계약한다. B사가 김씨에게 주는 돈은 130만원이다. 정규직 김씨가 받던 임금 중 70만원 가운데 20만원은 B회사의 이윤으로, 50만원은 A사의 이윤으로 재분배된 셈이다. A사·B사·김씨 3자가 맺고 있는 노동관계 속에서 사회적 총가치(생산)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착취가 증가하고 이윤이 늘어났을 뿐이다. ‘나쁜 일자리’에 빠져든 김씨는 거대한 고용불안층이란 저수지로 흡수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공무원·공기업에 취업하려고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도서관에 웅크려 앉아 있는 수많은 실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비록 도서관에서 거대한 사회적 낭비가 발생하고 있지만, 이 취업준비생들은 노동시장의 작동 원리를 누구보다 잘 간파한 합리적 경제인이다.

이런 왜곡된 시장구조 속에서 정리해고를 컨설팅해주거나 하청노동자를 공급하는 또 다른 중간착취자들도 거대한 규모로 형성되고 있다. 10명을 정리해고하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노동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정리해고로 임금비용이 줄어들고, 노동강도 강화로 생산성은 높아진다. 해고된 10명이 받던 임금 중 일부는 이들 컨설팅회사와 하청·용역 업체 관리자들의 소득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나머지는 원청업체가 이윤으로 수취한다.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되면 단기적으로 기업의 주가도 오른다.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내건 법인세 감면 역시 주가를 올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세후 순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인세를 아무리 깎아줘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수출 대기업이 국내 고용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판명됐다. 그 대안으로 이번에는 중소기업을 고용창출 루트로 잡고 중소기업 설비투자 정책자금을 대거 풀고 있다. 그러나 사실 투자와 고용의 괴리는 중소기업에서 더 심각하다. 포클레인 10대를 20대로 늘리는 투자라면 1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유형의 투자는 미미한 수준이다. 대기업도 그렇지만 중소기업일수록 노동자의 손·발·머리를 절감할 수 있는 자동화 기술투자가 대부분이다. 투자가 오히려 기존 일자리마저 축출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시장은 철저하게 고장나 있다.

‘낮은 고용’의 주범으로 ‘학력 인플레이션’이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높은 복지를 제공하는 독점 대기업의 ‘내부 노동시장’이 작동하면서 학력 인플레는 더 강화되고 있다. 현대자동차 임직원에게는 생산직·사무직 가릴 것 없이 자녀 2명이 졸업할 때까지 대학 등록금 전액이 무상지원된다. 대다수 중견기업 이상 민간기업들은 임직원 자녀의 대학 학자금을 수당(등록금 전액 혹은 일부)으로 지급하고 있다. 바로 옆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박씨는 아들이 대학에 다닌다는 이유로 연간 1천만원 넘는 돈을 회사에서 받는데, 나는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제발 아무 대학이라도 좋으니 들어가라”고 아이들을 떠밀 것 아닌가. 울산시교육청에 물어보니, 울산 지역의 최근 대학 진학률은 93%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자녀 학자금을 무상 지원하는 대기업 계열사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좀 빗나간 얘기지만, 중견기업 이상의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 수를 감안할 때 자녀 대학 등록금을 자기 임금소득으로 내는 사람은 꽤 줄어들게 된다. 이는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는, 매년 되풀이되는 저항이 왜 ‘불길’로 번지지 못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다. 또 대학들이 마음껏 등록금을 올리고, 전국 200여 대학 재단이 전입금 한 푼 안 내고도 여전히 먹고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대학에 가지 않고 직업훈련을 받는 자녀한테도 비슷한 금액의 보조금을 지원해준다면 어떨까. 국가고용전략회의에서 한번 고민해주기를 고대한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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