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시 전 미국 노동부 장관이 1992년에 쓴 이란 책에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디자인하고 부품을 생산·조립해서 만드는 전자오븐에는 이 회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제너럴일렉트릭(GE) 상표가 붙여져 가치를 더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미국 시장에서 GE 상표를 붙여 자사 상품을 판매하던 삼성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삼성은 글로벌 거대기업 반열에 올라섰고, ‘삼성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놀라운 존재로 탈바꿈했다. 대통령조차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우리 시대에 도대체 ‘기업’이란 무엇인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대기업은 국가 번영과 국민의 소득·소비 향상이란 맥락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즉 더 많은 케이크를 만들어내고,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사람들이 더 많은 케이크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의 한복판에 ‘거대기업’이 있었다. 기업은 위대한 번영의 시대와 풍요로운 삶으로 가는 자본주의의 기관차이자 자본주의의 꽃이었다. 거대기업들은 ‘국가 경제의 대표선수’로 불렸다. 당시 GM 사장 찰스 윌슨은 “국가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은 것이고 GM에 좋은 것은 국가에도 좋은 것”이라고 간명하게 갈파했다.
그러나 그 뒤 거대기업의 존재는 점점 더 국가 그 자체처럼 성장했다. 우리의 삶은 이제 국가의 각종 정책과 제도 못지않게 거대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출렁거린다. 거대기업이 생산·유통·소비하는 수많은 상품 목록을 보라. 일자리·소득·소비·주거·교육·치료, 심지어 죽음까지 거대기업이 지배하고 있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주식·펀드에 넣어둔 수많은 사람의 한쪽 눈은 투자한 거대기업이 돈을 잘 버는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지에 시시각각 촉각을 곤두세운다. 기업이 불안하고 위기에 처하면 우리 삶도 불안과 위기에 처한다.
이런 거대한 법인기업은 대체 누가 움직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일찍이 ‘경영자(또는 법인) 자본주의’를 주창한 경영학의 대가 앨프리드 챈들러는 오늘날 시장경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은 경영자라는 ‘보이는 손’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법인기업은 마술의 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를 통치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법인기업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법인기업의 권력 세계는 주의 깊게 방어된 세계다. 권력가와 정치가의 개인적인 성벽은 항상 역사와 화제의 재료였지만 거대기업 회장과 임원의 경우엔 그의 가정생활, 개인적 건강상태, 성적 습관, 그리고 (기업가) 정신마저도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존 갤브레이스, )
법인 거대기업들은 마천루 사옥 꼭대기 층에 있는 임원실(지휘사령부)에서 이사회를 개최한다. 다소 비밀스런 이 사령부는 흔히 ‘위대한 방’으로 불린다. 지난 150여 년간 기업을 지배해온 핵심 시장원리인 ‘수확 체감의 법칙’이 더 이상 관철되지 않는, 경이로운 ‘신경제’ 세계가 정보기술(IT) 산업 확산과 함께 도래했다는 1990년대 이후, 이 방을 중심으로 전례없는 규모의 금융 사기가 판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대형 회계법인들은 그들의 고객(거대기업)과 짜고 회계 조작을 일삼았다. 수지맞는 일감을 따낼 수만 있다면 기업 쪽의 농간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주면서 곳곳에서 사기가 창궐했다.
창 바깥으로 하늘만 보이는 위대한 방의 회의 테이블에 놓인 몇 장의 짤막한 보고서는 ‘단기간에 (더 정확히는 오늘 당장, 또는 이번주나 이번 분기에) 주가를 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굵은 글씨에 밑줄을 긋고 있다. ‘무슨 짓’의 목록 맨 윗자리는 회계장부 날조, 저임금 비정규직 확대, 인력 감축, 외주화를 통한 비용 감축 등이 차지하고 있다. 단기 수익을 내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인내심 있는 장기 투자’를 부르짖다가는 회의실에서 쫓겨날 거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주가가 올라야 내 자리도 보전된다. 내게 부여된 스톡옵션이 연봉의 몇십 배인가?’ 이것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임원들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노동자들도 단기 주주가치 극대화가 기업의 지배 원리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잘리기 전에 더 일해 벌어먹어야 한다. 내 일자리를 지키려면 더 많은 비정규직을 써야 한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장시간 노동은 더욱 고착화된다. 우리는 ‘나쁜 행위’에 엄청난 유인을 제공하는 거대기업 체제를 갖고 있다.
지난 번영의 시대에 거대한 ‘제조’기업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물품을 효율적으로 생산·공급하면서 국민 경제의 성장과 고용을 책임지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법인기업은 꼭대기 층에 앉아 자신을 지휘하는 ‘금융’이란 주술에 걸려 휘둘리고 있다. 시장의 정직성에 대한 믿음은 깨졌다. 거대기업은 국회의사당 주변에 사무실을 내고 정치헌금을 뿌려가며 정부를 설득하고 때로는 정부에 지시를 내리기까지 한다. 사실상 국가 통치에 참가하고 있다. 거대기업들이 다시 ‘번영의 불씨’로 작동할 수 있도록 누가 유도할 것인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조계완의 시장 딴죽 걸기’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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