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죠?” 친한 후배에게 문자가 왔다. “응, 그런데 일하기 싫어 죽겠어. 어쩌고저쩌고….” 한참 할 이야기, 못할 이야기 다 하고 온갖 친한 척 이모티콘(♡ *^^*,-_-a)을 남기고 문자 대화를 끝냈는데, 며칠 뒤 모르는 전화번호가 떠서 받았더니 웬걸, 그 후배다. “전화번호 바꿨어?” “뭔 소리예요, 5년 전부터 이 번호인데.” 허걱, 전화번호를 엉뚱한 이름으로 저장했던 것이다. 그럼 그건 누구였단 말인가. 그 민망한 이야기는 다 어쩌라고. 이제 와 다시 문자를 보내 “누구세요?”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전화번호부와 이름을 잘못 짝지워놓은 탓이다.
드라마를 볼 때도 그런 일이 종종 있다. 때로는 엉뚱한 제목이나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가, 어쩌면 방송사의 빗나간 홍보 전략이, 과도하게 욕심 낸 1·2회가 ‘잘못 저장된 ID’의 역할을 한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를 보자. 일본의 주간 만화잡지 같은 제목, 의 이은성 선생을 연상케 하는 지방대 출신 레지던트, 의 민기랑 말투까지 닮은 국가대표 찌질이, 대놓고 미국 드라마 의 휴 로리를 패러디하는 선수촌 의무실장, 후딱 하면 웃통을 벗어던지는 꿀 복근 유도선수들, 이미 에서 한 번 보여준 김소연의 전문직 연기…. 30년 드라마 시청 경력, 매의 눈으로 볼 때 이건 안 봐도 분류 나와주시는 거다. 메디컬 드라마 불패신화와 이후 바람을 타기 시작한 드라마틱한 운동선수 이야기의 인기, 동시간대에 경쟁 드라마가 없는 편성을 고려하면 웬만한 시청률은 나오겠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에피소드들로 안전하게 가는 데 만족.
겨우 2회까지 본 것만 가지고는 솔직히 이런 ‘ID’들이 이 드라마를 만드는 진짜 사람들- 쓴 사람은 단막극 명작 의 노지설 작가, 연출은 의 박형기 감독, 이렇게 부스스 별거 없어 보일 때야말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 ‘엄포스’(엄태웅, 이건 팬심으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반짝이는 주연이었던 과 시리즈보다 과 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실 것)- 을 덮어버리게 될지, 아니면 제목과 상투적인 설정들이야 까맣게 잊어버리고 몰입하게 될 수 있을지,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딱지를 붙여버리면 저 휴대전화 사건과 같은 일이 생겨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었다.
정성스럽게 찍고 붙인 화면, 별 기대 안 했던 남자 주인공의 억지스럽지 않고 ‘정겨운’ 연기. 그리고 공들여 고른 소품(풍등이 정말 예뻤음)과 튀지 않는 음악(술집에서 ‘짙은’의 신곡을 골라주시는 쎈쑤!)이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는 또는 잘못 입력된 ID가 아니라 그 너머 진짜 사람들, 제작진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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