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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2)] “록 짓는 늙은이 되련다”

등록 2003-10-02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국적 록 창조하고 실험적 음악 선보여… 우리 시대의 장인을 제대로 대접할 수 없나

1971년 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르고 삼선(三選)에 성공한 뒤 한국사회는 병영을 닮아갔다. 박정희 정권의 제1의 타깃은 ‘불온’ 세력이었지만 ‘퇴폐’ 세력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단속이라는 일상적 통제와 더불어 해피 스모크(대마초)에 대한 단속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부터 신중현이 겪은 음양의 압력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된 바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분명한 것은 이런 압력 속에서도 신중현의 창작력이 여전히 왕성했다는 점이다.

누구도 말리지 못한 왕성한 창작력

1971년 말부터 약 2년 동안 활동한 5인조 그룹 더 멘(The Men)은 가수들을 내세운 음반을 주로 발표했다. 장현, 지연, 김정미, 윤용균, 양희은, 서유석 등등. 이 가운데 김정미의 음반들은 ‘형식상으로는 가수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중현 작품’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더 멘은 가수들의 음반 한구석에 길고 몽환적인 연주를 녹음했고, 이 곡들에서 신중현은 직접 노래를 불렀다. 23분에 달하는 (윤용균의 (유니버어살 KLS-61, 1973) 수록), 18분에 달하는 (지연의 (유니버어살 KLS-66, 1973) 수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현의 (유니버어살 KLS-46, 1972) 수록) 등등. 이 음반들이 황학동 중고 음반시장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한다든가 외국인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인다든가 하는 현상은 그의 전설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까지 파급되고 있음을 웅변해준다.

1973년 신중현은 이남이, 김호식(뒤에 권용남으로 교체)과 함께 ‘파워 트리오’ 형식의 그룹 ‘엽전들’을 만든다. 엽전들을 통해 신중현은 ‘한국적 록’을 창조하고 나아가 ‘대중가요계’까지 파장을 확장했다. 그 전까지 신중현이 작곡하고 다른 가수가 부른 곡이 ‘가요’로서 히트한 것은 있어도 신중현의 그룹이 직접 노래하고 연주한 곡이 히트한 일은 없었지만, 은 예외였다. 은 석유파동이라는 최악의 경제상황에서 10만장 가까이 팔려나가는 ‘불황 속의 독주’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신중현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1975년 기성곡도 모두 재심의한다는 예륜(뒤의 공륜)의 가요정화운동에서 을 포함해 19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신중현은 ‘최다 금지곡 보유 작곡가’라는 불명예를 쓰게 되었다. ‘퇴폐’ 혹은 ‘저속’이라는 딱지가 그를 따라다녔고,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모방’이라는 규정도 따라다녔다. 그 결정타는 1975년 12월의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었다. 동료인 박광수, 권용남, 김추자 등과 함께 습관성 의약품 복용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4개월 만에 풀려나오기는 했지만 공식적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그 뒤 4년 동안 그는 깊은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1979년 12월 활동금지가 풀린 신중현은 활동을 재개했다. 신중현과 뮤직 파워, 신중현과 세 나그네 등의 그룹을 이끌면서 야심차게 재기를 노렸지만 대중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았다. 서서히 현역으로부터 물러나면서 그는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1985~87년에 그는 라이브(Live)라는 소극장 형태의 공연장, 그리고 태평극장을 개조한 록 월드(Rock World)라는 대형 공연장을 만들어보았지만 둘 다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이 공간을 통해 ‘한국 록의 적자(適者)’의 계보가 만들어졌다는 점. 그 적자들에는 최구희, 주찬권, 김동환 등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 그리고 그의 아들 신대철과 신윤철을 포함한 ‘헤비메탈’ 음악인들이 포함되었다.

▷ 윤용균 (유니버어살 KLS-61, 1973)(뒷면),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지구 JLS-120891, 1974), 신중현과 뮤직 파워 2집 (지구 JLS-1201707, 1982), 신중현 (킹 KSC-7012 PA2CD, 1997).맨위부터.



야인으로 떠돌며 후진 양성에 나서

1988년 신중현은 문정동으로 자리를 옮겨 우드스톡이라는 록 카페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1년 뒤 영업을 포기하고 이곳을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그는 기나긴 은둔에 들어갔다. 그의 유일한 공적 활동이라곤 1995년부터 수원여대 생활음악과와 대중음악과에서 외래교수 혹은 전임교수의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친 일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인물이 되었다. 1988년, 1994년, 1997년 신중현의 이름을 내세운 음반들이 발표되었지만, 예술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혹은 ‘야하면서도 품격 있는’) 신중현의 작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등 한국 전통음악을 영미의 록 음악과 결합하려는 그의 실험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신중현의 업적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방송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신중현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일이 간헐적으로 있었고, 1994년에는 신중현의 삶과 음악을 다룬 서적 (노재명 지음, 새길)도 발표되었다. 또한 1990년대 중반 현역 대중음악인들이 신중현의 곡을 다시 불러 히트하는 일이 동시에 발생했다. 신효범의 (1994), 조관우의 (1995), 봄여름가을겨울의 (1995) 등이 몇몇 예일 것이다. 비슷한 시점 장선우의 영화 (1996)의 사운드트랙에 김추자가 부른 이 수록된 것도 이런 ‘신중현 재조명 현상’을 부채질한 작은 사건이었다.
마침내 1997년 5월7일 잠실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신중현 음악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공연이 이루어졌고 후배들이 신중현의 곡을 연주한 기념음반도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신중현에 대한 공식 호칭은 ‘록의 대부’, 일상적 호칭은 ‘선생님’이 되었다. 1999년 연말 20세기를 떠나보내는 시점에서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신중현의 공연이 열렸고, 가 초연되었다. 신중현식 애국주의를 담은 이 곡은 1992년에 만들어놓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주가 미루어진 곡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실에 고무되었을까. 신중현은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자신이 주주로 참여한 ‘신중현 MNC’라는 사업체를 설립해 새로운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2002년 자신의 옛 히트곡을 다시 연주하고 직접 노래까지 한

이 그 성과물 중 하나다. 그렇지만 음악밖에 모르고 세상물정에는 어두운 노(老)음악인에게 사업이란 그리 쉽지 않았다. 현재 이 사업은 실질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다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1975년 이전에 발표했던 음반들의 재발매 사업이 계속되었지만, 이 음반들의 판매 성적도 썩 좋지는 않다. 이런저런 ‘예우’의 수사가 무색한 일이다.

우리는 진정 록의 대부로 여기는 걸까

지금도 신중현은 문정동의 작업실에서 숙식하다시피 하면서 이런저런 구상을 계속하고 있다. 뭐랄까, 황순원의 소설 에 등장하는 노인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대가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외롭고 초라해 보인다. 그의 행동에 대해 ‘유아독존’ ‘옹고집’이라는 불평도 있지만, ‘홀로 지내는 유목민’(본인의 표현이다)의 성향이 정권의 탄압, 동료들의 떠나감, 세인의 무관심 속에서 길러진 것이라면 그걸 하루아침에 바꿔달라고 하는 것도 무리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록 짓는 늙은이’ 신중현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볼 때가 온 것 같다. 그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해 자유롭게 창작할 경제적 여건을 마련해주든지, 그의 작품을 학술적으로 조명해 ‘신중현학’을 만들어내든지, ‘신중현 박물관’이라도 만들어 망실돼가는 그의 자료들을 제대로 보관이라도 하든지…. 터져나간 독 조각 위에 꿇어앉아 장인으로서 최후를 맞는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기 전에 말이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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