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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1)] 신화로 남은 록의 지존

등록 2003-09-19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로 불리는 까닭… 작곡·연주 등서 탁월한 업적 남겨 </font>

사람들은 그를 ‘한국 록의 대부’라고 부른다. ‘서양의 록 사운드를 한국의 가락과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을 ‘한국적 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예우’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고 연주하고 노래한 곡들 가운데 과 말고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결성했다가 해산시킨 수많은 그룹들에 대해서도 을 ‘히트시킨’ 엽전들과 을 ‘히트시킨’ 뮤직파워 외에는 별달리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가 ‘대부’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난의 가정사… 미8군 무대 주름잡아

신중현(1938년생, 주민등록상으로는 1940년생)은 서울 신당동에서 태어났지만 4살 때부터 9살 때까지 일본 규슈(九州)를 거쳐 만주 신경(新京)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는데, 이 사실은 1940년대 말~1950년대 초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그의 가족이 받게 될 수난을 설명해준다. 12살 때 여동생과 어머니를, 13살 때 아버지를 잃은 신중현은 남동생과 더불어 고아가 된다. 이후 낮에는 제약회사의 사환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밤 11시가 넘으면 일본에서 나온 기타 교본을 보고 독학으로 기타 실력을 연마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동화 살롱을 찾아가 당시 최고의 악단인 김광수 악단 앞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all shook up>을 기타 한대로 연주하면서 노래 불렀다는 이야기, 미8군 무용수의 소개로 미8군 쇼 무대에 진출하여 장교 클럽에서 기타 솔로를 연주한 뒤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이야기 등은 그의 초기 경력에서 신화처럼 전해내려오는 일화들이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신중현은 재키, 히키, 스코시 등의 별명으로 불리면서 미8군 무대를 주름잡았다. 이 시절 그가 비교적 오랫동안 몸담았던 곳은 테너 색소폰 연주자 최태국이 악단장을 맡은 스프링 버라이어티(Spring Variety)라는 쇼 단체였는데, 이 무렵의 기록은 ‘히키 申’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기타 연주 음반인 으로 남아 있다(이 음반은 1959년에 발표되었다고 알려졌으나 ‘12인치 LP’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1961년 이후에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프링 버라이어티가 ‘빅 쇼’였다면, 1962년께 결성한 클럽 데이트(Club Date)는 ‘스몰 쇼’였다. 클럽 데이트는 재즈 악단으로부터 록밴드, 당시 용어로는 ‘보컬 그룹’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150cm가 조금 넘는 신중현이 장신 멤버의 가랑이 사이로 왔다갔다하면서 기타를 연주하는 쇼맨십이 입소문으로 번졌고, 그 결과 그는 음악감상실을 비롯한 국내 무대에도 서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일반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1963년께 애드 훠(Add 4)라는 4인조 보컬 그룹을 만들었다. 애드 훠의 매니저를 맡은 인물은 당시 극장 쇼의 흥행을 주름잡던 쇼단 ‘플레이보이 프로덕션’의 단장 이순우였다.
애드 훠의 음반 이 발표된 것은 1964년 말이었다. (서정길 노래), (원제: 내 속을 태우는구려, 신중현 노래) 등 뒤에 다른 가수들이 불러 히트한 곡을 비롯하여, 이교숙(당시 해군 군악대장, 뒤에 이화여대 교수)에게 사사한 음악 이론을 응용하여 만든 자작곡들이 수록된 음반이다. 누가 한국 최초의 록 그룹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키 보이스나 코끼리 브라더스와 달리 애드 훠가 자작곡을 추구했다는 점은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이 음반에 장미화(!)의 노래가 두곡 수록된 것은 당시 ‘패키지 쇼’나 ‘극장 쇼’의 관행을 보여준다.

불멸의 명곡으로 시장에서 인정받기까지

그렇지만 애드 훠는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야심차게 미8군 무대를 뛰쳐나왔던 신중현과 애드 훠는 다시 동두천으로 돌아가 미군 클럽에서 ‘야메 쇼’를 하다가 곧 정식 오디션을 보고 미8군 무대로 들어갔다. ‘한국의 벤처스’라고 홍보하면서 몇종의 ‘경음악(연주곡) 음반’을 발표했지만 상업적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어쩌면 이때의 신중현은 요즘도 젊은 록 음악인들이 그러듯 ‘한국에서 록은 안 돼!’라는 생각에 빠졌을지 모른다. 실제로 신중현은 베트남의 군예대를 거쳐 외국으로 이민갈 생각을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물론 복잡한 심사 속에서도 이태원의 로 포 클럽으로 옮겨 넉 아웃(Knock Out)이라는 패키지 쇼를 이끌면서 솔과 사이키델릭 같은 당시의 첨단 조류를 민감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중현은 1968년 말 자신의 팔자가 바뀌는 사건을 맞는다. 다름 아니라 펄 시스터스의 데뷔 음반 을 자신의 작품집으로 만든 것이다. 와 등이 수록된 이 음반은 대박을 기록하면서 1960년대 말을 화려하게 수놓았고 신중현은 순식간에 ‘히트곡 제조기’ 대열에 합류했다. 이는 단지 대중음악의 흐름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꾼 사건이었다. 펄 시스터스에 이어 김상희, 김추자, 이정화 등의 ‘솔 가수’들이 ‘신중현 작품집’을 발표했고, 발표하는 족족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주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중현은 “폭등하는 인기 속의 작곡가이며 가장 야심적인 플레이어”( 1969년 8월10일)였다.
그렇지만 신중현의 면모는 단지 ‘가요 작곡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가수들의 음반과 공연을 만들어주는 사이, 신중현은 1968년께 블루즈 테트(Blooz Tet), 1969년께 덩키스(The Donkeys), 1970년께 퀘션스(The Questions), 1971년께 더 멘(The Men)이라는 ‘그룹사운드’를 이끌고 서울시민회관 등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그 가운데 덩키스를 이끌고 1969년 10월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한 ‘신중현 사이키델릭 리사이틀 쇼’, 그리고 1970년 7월25일 퀘션스를 이끌고 참여한 ‘Go Go Gala Party’는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그룹사운드 전성기’의 전설로 남아 있다(후자의 공연 실황은 라는 이름으로 무단 발매되었다).

1971년 이전, 그 열정적인 활동들

신중현의 그룹은 이름뿐만 아니라 멤버도 수시로 변동했다. 때로는 가수나 연주인이 배신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신중현이 멤버를 갈아치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과는 불변이었다. 매일 밤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서 악보에 작곡과 편곡을 하고, 오후에는 스튜디오에 들러서 녹음을 하고…. 당시에 활동하던 록 음악인들이 대부분 그랬다지만 신중현이 이런 삶을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체로 ‘질린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이렇게 작곡가이자 연주인이자 밴드(그룹)의 리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존재가 된 신중현의 삶은 1971년 이후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우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table><tr><td bgcolor="ffcc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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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 클럽 데이트: 신중현(기타), 신지철(테너 색소폰), 김대환(드럼), 객원 보컬은 현 시스터스 등

애드 훠: 신중현(리드 기타, 보컬), 윤광종(리듬 기타), 한영현(베이스), 김대환(드럼, 뒤에 권순권으로 교체), 서정길(보컬)

블루즈 테트: 신중현(리드 기타), 권순생(리듬 기타), 한영현(베이스, 뒤에 이태현으로 교체), 조갑출(드럼), 객원 보컬은 박인수 등

덩키스: 신중현(리드 기타), 오덕기(리듬 기타), 이태현(베이스), 김민랑(오르간), 김호식(드럼), 객원 보컬은 이정화 등

퀘션스: 신중현(리드 기타), 이태현(베이스), 김민랑(오르간), 김대환(드럼), 객원 보컬은 박인수, 송만수 등

더 멘: 신중현(기타, 보컬), 이태현(베이스), 김기표(오르간), 문영배(드럼), 손학래(오보에/색소폰), 박광수(리드 보컬)

엽전들: 신중현(기타, 보컬), 이남이(베이스), 김호식(드럼, 뒤에 권용남으로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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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r></table>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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