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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길] ‘황색 솔’도 계보가 있다

등록 2003-11-27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흑인 음악에 충실한 이색적 그룹사운드 결성… 탁월한 작 · 편곡 실력에도 연주자로 남아 </font>

최근 ‘펄시스터스’라는 흘러간 이름이 ‘연예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배인순이 쓴 자전적 소설이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고 있다. 그와 더불어 펄시스터스의 노래가 ‘솔풍’이라고 칭하는 글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실제로 1969년 발표된 펄시스터스의 데뷔 음반에는 ‘Soulful Pearl Sister Hit Album’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말은 1960년대 말~70년대 초 펄시스터스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계에 ‘혁명’이 발생할 때 키워드가 솔(soul)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다. 조금 뒤에 대두하는 ‘포크’와 더불어 ‘솔’은 미국 대중음악이 ‘가요’의 한 스타일로 토착화된,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혼종화된 케이스였다. 그 결과 ‘솔 가수’의 계보는 계속된다. 박인수·장현·박광수·윤항기·황규현·최헌 같은 남자 가수들, 그리고 장미화·김추자·김정미·임희숙·이은하·인순이에 이르는 여자 가수들….

여기서 잠시 이은하에 눈을 멈추어보자. 그리고 1970년대 말 ‘손가락으로 동서남북 찔러대는’ 춤을 통해 슈퍼스타로 등극하면서 대히트를 기록한 (1978)나 (1979)를 다시 들어보자. 그러면 이은하의 까칠까칠한 음색의 솔풍 창법 못지않게 깔짝거리는 기타가 주도하는 펑키하고 브레이크(break) 걸린 리듬을 실감할 것이다. 이 노래에서 편곡과 연주를 맡은 인물은 김자, 명자, 길자 쓰는 분이다. 김명길. 보통 사람들에게는 과문한 이름이다. 누구일까.

솔 대왕 ‘데블스’

1970년 7월 서울 시민회관에서는 ‘제2회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그룹들이 총출동한 이 대회에서 한 6인조 그룹이 해골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왔고, 멤버 하나는 여자의 주검이 들어 있는 관을 끌고 나왔다(물론 진짜 주검이 아니라 ‘쇼걸’이 분장한 것이었다). 무대 연출로 이들은 ‘구성상’을 받았고, 당시 리드보컬을 맡은 연석원은 ‘가수왕상’을 받았다.

그룹의 이름은 데블스. 당시로서는 대담한 이름이었다. 김명길은 이 대담한 그룹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았다. “우리는 그룹이었지만 록이 아니라 솔을 했다”는 김명길의 회고처럼 이들은 ‘흑인 음악’에 가장 충실했던 그룹이다. 또한 ‘그룹사운드’라는 정의에 충실한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전 멤버가 똘똘 뭉쳐서 응집된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존재로 유명하다. 또한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각종 묘기도 보여주는 등 쇼맨십이 풍부했던 존재이자 대다수 그룹들이 턱시도를 입던 시절 촌스럽기 이를 데 없는 복장으로 무대에 올라간 ‘촌놈들’이기도 했다.

데블스의 기원은 김명길(1946~)이 1967년 인천의 기지촌 클럽에서 앰비션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한 것으로 시작된다. 1968년 파주로 무대를 옮겨서 데블스라는 이름의 4인조로 활동하다가 왜관의 기지촌 클럽인 실버 달러라는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서울에 입성할 때의 6인조 데블스는 왜관에서 활동할 때 인근의 또 다른 클럽에서 연주하던 에인절스의 멤버들과 합쳐져 결성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연석원이 에인절스의 멤버였다.

즉, 이들은 ‘미 8군 무대’를 통해 대중음악인의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고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이들은 미군 부대 주변에서 번성했던 기지촌 클럽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오로지 감각으로 음악을 익히고 또 연주했다. 천하의 조용필도 파주 용주골(!)의 기지촌 클럽에서 음악 경력을 시작했으니 말이다(올해가 그의 음악인생 35주년이라고 하니 이때가 언제인지 따져보길). 김태화, 유현상, 이철호 등 한때 내로라 하는 록 보컬리스트들도 이 시절에 파주와 동두천과 이태원을 전전했다. 이들의 목소리에 ‘영혼’(soul!)이 담겼다면 이들의 초기 경력의 특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font color="gray">▷ 데블스(1974)(아세아레코드 ALS-337), 데블스(1977)(지구레코드, JLS-1201258), 이은하(1979)(서라벌레코드, SR-0151), 쾌션스(1983)(노만기획/서라벌, SN-0017)(맨위에서부터)</font>



방금 언급한 인물들은 솔로 가수로 독립한 뒤 가요 시스템에 적응했고, 개중에는 ‘상업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명길과 데블스는 끝까지 그룹을 유지하고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한 보기 드문 존재였다. 데뷔 음반을 발표한 뒤 연석원이 탈퇴하는 등 멤버 변동이 있었지만(그는 1980년대 이후 ‘작·편곡가’로 명성을 떨친다), 이들은 오리엔탈호텔의 나이트클럽인 닐바나를 필두로 1970년대 초·중반 융성한 ‘고고 클럽’에서 명성을 얻은 뒤 ‘가장 팀워크가 좋고 연주를 잘 하는 그룹’으로 명성을 얻었다.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의 이른바 ‘포 리듬’(4 rhythms)에 트럼펫과 색소폰이 추가된 기악의 빵빵한 앙상블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적어도 사랑과 평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데블스는 밤무대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2~3년에 한번 꼴로 자작곡 비중이 높은 정규 음반을 모두 4개 발표했다. 당시 그룹사운드들의 음반 대부분이 번안곡 중심이거나 직업 작곡가의 ‘작·편곡집’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1974년 발표한 2집 음반에 수록된 는 당대의 히트곡이자 그룹사운드의 고전이 되었다. 최근 LP로 재발매된 이 음반에는 같은 펑키한 리듬을 시도한 숨겨진 명곡도 들을 수 있다.

그룹사운드의 흥망성쇠

그렇지만 1977년에 발표된 음반을 마지막으로 데블스의 새 음반은 더 이상 발표되지 않았다. 고고 클럽이 라이브 연주 중심에서 ‘판을 틀어주는’ 식으로, 이른바 ‘디스코텍’으로 변화하면서 그룹들의 무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김명길이 가수들의 음반에 편곡과 연주를 맡는 등 ‘외도’를 한 것도 이 무렵이다. 기지촌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데블스의 뒤를 보아주었던 ‘매니지먼트계의 카리스마’ 박영걸이 설립한 노만기획의 여가수들(이은하·정난이·윤승희 등)의 음반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히트곡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음악인과 매니저 사이의 일반적 관행을 넘지는 못했다.
데블스는 1980년 무렵에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 김명길은 더 쾌션스라는 그룹을 이끌어 마포가든 호텔의 나이트클럽 등에서 연주하고 라는 음반도 발표햇다. 그렇지만 이후 그의 삶은 마치 영화 에서 묘사된 주인공의 모습을 닮았다. 1년 전쯤 만났을 때도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한 호텔의 나이트클럽에 ‘일’을 하러 들어갔다.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많은 음악인들은 “(김)명길이는 일찌감치 그룹을 그만두고 작곡이나 편곡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저 그룹으로 연주하는 걸 좋아하다가 지금 저렇게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도 그는 그룹을 새로 만들어서 연주하고 싶어한다. 이걸 그저 본인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말아야 할까. 재발매된 음반의 라이너 노트에서 그는 “후회없는 삶을 살고자 했는데…”라고 적어놓았다. 그의 삶을 회상해보면 ‘한국에서 그룹사운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어렴풋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걸 명확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아직 힘들지만.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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