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663300">매혹의 트럼펫 마스터로 청년음악 후견인 구실… 악단장으로 이름 날리며 당대 명반에 이름 새겨 </font>
젊은 사람들에게 김인배라는 이름은 낯설지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김인배라는 이름은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중년들이 10대 시절에는 ‘매혹의 트럼펫’ 등의 이름을 가진 ‘경음악 음반’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트럼펫을 앞세운 음반의 주인공으로는 김인배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현대음악 선구자에게 사사한 연주자
1932년 평안북도 정주 태생의 김인배는 어린 시절부터 주먹이나 종이나 대나무로 나팔 모양을 만들어 불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신호 나팔을 부는 단계를 지나 중학교(함흥의 영생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브래스 밴드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그 뒤 혈혈단신으로 월남했고, 군에 입대하자마자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도 전쟁의 일선에서 비켜나 육군 군악대에 들어가서 트럼펫을 연주할 수 있었고, 대구에서는 군악대원, 문관, 일반 연주자로 구성된 대한 심포니에서 연주 생활을 계속했다. 거기서 안병서, 김동진 같은 현대 한국음악의 선구자들로부터 사사했다. 그러니 이때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을 하려고 했지 ‘대중음악’을 할 생각은 없었다.
김인배가 대중음악을 접한 것은 육군 군악대에 있을 무렵 미 8군 무대에 나가면서 스윙(재즈)을 연주하면서부터다. 김용세(피아노), 이정식(테너 색소폰), 최세진(드럼), 황병갑(베이스), 김강섭(피아노) 등이 그 당시 김인배의 동료들이었다. 아스라해지는 이름들이지만 한국에 재즈를 심은 인물들이다. 그 뒤 김광수 악단에 스카우트되어 은성, 크라운 같은 고급 살롱에서 ‘경음악’을 연주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가요’를 접하기 시작했다. ‘김광수 악단’이라…. ‘가수 배호의 셋째 외삼촌’이라고 알려진 그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한국방송 악단의 초대 악단장을 맡는 등 한국의 음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1960년대 초는 TV가 개국을 하고 민간방송이 속속 태동하는 등 방송의 매력이 음악인들을 휘어잡을 무렵이다. 김인배 역시 스물아홉살 되던 무렵인 1963년 한국방송 라디오의 악단장을 맡아 1년 정도 지휘봉을 잡았다. 1973년부터는 다시 동양방송(TBC) 라디오의 악단장을 맡았고, 1980년 언론 통폐합 뒤에는 한국방송 라디오 악단(현재의 KBS 팝스 오케스트라의 전신)에서 악단장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당시의 방송국 악단 생활이란 ‘명예직’일 뿐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뛰어든 곳은 ‘작곡가 생활’이다. 다행히도 1960년대 초·중반에는 일제 시대부터 계속된 트로트에서 탈피해 당시의 젊은층의 취향에 맞는 밝고 건전한 노래들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작곡가로는 손석우·김광수·나화랑·전오승·송민영·황문평, 작사가로는 이진섭·이호로·김석야 등이 주축 인물이었고 이들은 이른바 ‘방송작가 그룹’을 형성해 영향력을 발휘했다.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 데뷔 지원
김인배 역시 방송작가 그룹의 일원이 되어 작곡가 생활을 시작했다.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던 시절 드라마 주제가였던 (한명숙)와 (한명숙) 등을 시작으로 작곡을 시작한 그는 (김상국), (남일해), (조애희), (성재희 노래) 등의 주옥 같은 히트곡을 남겼다. 현대적 대중문화가 형성되던 무렵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곡들이다.
‘불세출의 가수’ 배호가 세인에게 알려지는 과정에서도 김인배의 공이 컸다. 천지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할 때 배호는 김인배 악단의 드러머 겸 가수로 있었고, 영화음악 을 녹음해 방송전파를 타기 시작했다(이 곡이 수록된 ‘김인배 작곡집’에는 한명숙의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당시 작곡가들은 레코드사에 전속돼 활동하던 시기. 김인배는 오아시스레코드를 시작으로 지구레코드, 대도레코드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지냈다. 저작권 개념도 없던 시기라서 작곡가의 수입은 주먹구구식이던 때였다. “방송국 악단 생활도 작곡가 생활도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돈을 벌려면 외국곡 편곡 일을 해야 했어요. 그 일도 매일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매일 밤 무대에 서야 했죠”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김인배 악단’은 매일 댄스홀(카바레)에서 연주하고 짬짬이 ‘취입소’(녹음실)에서 녹음을 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은 ‘남들이 가무를 즐기는데 풍악이나 울리는 악사’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게다가 1960년대 말 이후 이른바 ‘젊은 음악’의 등장은 경음악 악단의 존재도 위협하게 되었다. ‘신세대 가요’가 등장하면서 록 밴드가 설 자리를 잃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김인배는 ‘그룹 사운드’나 ‘포크송’의 역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음반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사진/ 1960∼70년대 김인배가 작업한 음반들. (왼쪽부터)배호 외 (지구레코드 LM 120132, 1966), 도비두 외 (대도레코드 STLK-7114, 1969), 펄 시스터스/트윈 폴리오 〈I Love You〉(지구레코드 JLS-120329, 1969), 조영남 외 (지구레코드, JL-120291, 1969), 히 화이브/쥰 시스터즈 <hey jude back>(지구레코드 JLS-120377, 1970), 김인배 (오아시스 ORC-1595, 1998·CD).
한국의 ‘부에나 비스타…’를 꿈꾼다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가운데 ‘김인배 작편곡집’을 통해 데뷔하거나 인기를 다진 경우는 매우 많다. 히 화이브, 쥰 시스터스, 펄 시스터스, 조영남, 도비두(김민기가 멤버로 있던 듀엣), 최양숙, 최안순 등등…. 이들의 음원 중에는 김인배가 직접 편곡하고 노래와 연주를 지도해준 것도 있고, 단지 옆에서 감독하는 역할로 그친 것도 많다. 어쨌든 그가 당시 새롭게 태동하는 젊은 음악인들의 감성을 이해했던 몇 안 되는 베테랑 음악인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작·편곡가로서 김인배의 전성기는 1970년대 초반까지였다. 그 이유에 대해 본인은 “지구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재미를 못 봤어. 음반사 사장이 ‘트로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몇곡 해보기는 했지만, 잘 하지도 못하는 것을 하느라 힘들었어. 작곡가는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끝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워”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한때 신선했던 감각과 재능을 소진당하면 현역에서 물러나는 한국 음악인들의 일반적 행로를 잘 묘사해준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연주인들을 제대로 재평가할 자리는 언제쯤 마련될 수 있을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인생역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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