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고전 등 재창조에 탁월한 역량 발휘… 편곡에 일가 이루고 연주·지휘자로 현역 활동
정성조를 소개하려면 그가 현재 KBS관현악단장이자 재즈 색소폰 연주인이라는 사실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등 KBS관현악단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지휘봉을 잡은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데 유심히 들으면 편곡이나 사운드의 질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뒷모습만 나오지만 그는 가끔씩 색소폰을 들고 연주한다. 나이 지긋한 독자라면 1960년대를 풍미했던 색소폰의 스타들, 예를 들어 길옥윤, 이봉조, 이정식 같은 고인(故人)들을 회상하기도 할 것이다. 이 고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정성조는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넓고도 깊은 업적을 남겼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뚜렷한 족적들
정성조(1946~)의 연배라면 그룹사운드나 통기타 포크 등 ‘아마추어적인 음악적 실천’이 젊은이들 사이에 한참 유행할 때다. 그렇지만 정통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는 서울고등학교 재학 시절 밴드부를 거쳐 미 8군 무대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니까 1964년일 것이다. 그가 연주하던 미 8군 쇼 단체는 스프링 버라이어티(Spring Variety). 다름 아니라 지난번 ‘신중현이 기타를 연주하던 쇼단’이라고 소개한 곳이다. 뒤에 정성조가 가끔씩 신중현과 작업하게 된 것도 이때의 짧은 인연 때문이다.
정성조가 본격적으로 ‘프로페셔널’이 된 것은 길옥윤과 만나면서부터다.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길옥윤을 만나 그의 악단에 합류해 아스토리아 호텔과 국제호텔 같은 서울의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연주인 생활을 계속했고 뒤에는 동양방송(TBC)과 한국방송(KBS)의 방송사 악단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런 분주한 생활로 인해 그는 당분간 ‘대학교 중퇴’의 학력을 갖게 되었다. 1966년 뒤늦게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이미 직업음악인의 길을 걷고 있던 그에게 ‘출석’은 힘든 것이었고, 뒷날 ‘그때 사정이 있다고 말하지 그랬느냐’라는 지도교수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재학 시절에는 1968년 TBC에서 주최한 ‘제2회 전국남녀대학생재즈페스티벌’에 서울대 음대팀으로 출전해 2위를 차지한 일도 있다. 누가 보아도 1위였지만 ‘너무 프로 같다’는 이유로 2위에 만족했다는 이야기는 이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성조 콰르텟은 1970년대 초 김민기, 양희은, 쉐그린(뒤에는 한대수) 등 포크 가수들의 음반에서 편곡과 연주 등의 ‘세션’을 맡아주기도 했다. 의 플루트 소리, 의 색소폰 소리가 바로 정성조의 것이다. “그쪽에서 해달라고 요청해서 그냥 한번 가서 해준 것이고, 역사의 한 획을 긋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지만, 이 음반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이고 여기에 정성조의 숨결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낮에는 세션과 작·편곡, 밤에는 연주자로
이상의 경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음악적 뿌리는 재즈(특히 비밥)였다. 그렇지만 1972년께 ‘정성조와 메신저스’를 결성한 뒤에는 일렉트릭하고 ‘모던’한 사운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메신저스는 시카고(Chicago),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스(Blood, Sweat & Tears), 스틸리 댄(Steely Dan)처럼 재즈에 뿌리를 둔 록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초기에 신관웅, 최선배 등 한국 재즈계의 인물들이, 뒤에는 작곡가로 성공을 거둔 이범희도 거쳐갔다. 메신저스가 연주한 장소는 젊은이들의 성지였던 ‘생음악 살롱’ 오비스 캐빈과 길 건너편에 있는 로열호텔의 ‘고고 클럽’이었다. 속어로 ‘가께모찌’(하루에 두곳에서 연주하는 일)를 하는 등 메신저스는 ‘밤무대’에서도 인기가 좋은 그룹이었다. 메신저스는 1970년대 말 인기 가수로 등극하는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리드 보컬을 맡은 최병걸과 베이스를 연주하면서 노래도 부른 조경수(‘배우 조승우의 아버지’라고 해야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다.
1970년대 내내 그는 밤에는 무대에서 연주하고 낮에는 녹음 세션이나 영화음악의 작·편곡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갔다. 그가 음악을 맡은 영화들 가운데 (1974)는 청년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 ‘최인호의 소설, 이장호의 영화, 정성조의 음악’은 1970년대 청년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삼위일체 정식이었다(묘하게도 세명 모두 서울고등학교 동문들이다). 그 뒤에도 (1975), (1977), (1980), (1985), (1986) 등의 문제작에서 음악을 맡았다. 영화음악 가운데 등 몇개의 히트곡도 나왔지만, 대중가요를 작곡하는 게 그의 본업은 아니었다. 그에게 영화음악은 “노래 반주 아니면 녹음할 게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음악을 조금이나마 내 취향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아, 그 전에 정성조는 1979년 유학길에 올랐다. 보스턴의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한 뒤 1983년에 귀국했으니, ‘버클리 유학생 1세대’인 셈이다. 귀국한 뒤에도 가수들의 음반, 영화음악, 뮤지컬 등에서 음악 감독과 편곡을 맡는 바쁜 일과가 계속되었다. 뮤지컬을 예로 들어보면 같은 뮤지컬의 고전들이 그의 손끝을 거쳐 재창조되었다. 한편 그는 1988년부터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교수로서 교육자의 역할도 맡았다. 황망한 와중에서도 재즈 클럽에서 틈틈이 연주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요일 오후 9시에 이태원의 올 댓 재즈(All That Jazz)를 찾아가면 정성조가 포함된 재즈 퀸텟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19년째(!) 같은 장소에서 연주하는 것은 가히 기네스북 감일 것이고, 그래서 1993년에 발표한 연주곡 음반의 제목도 <all that jazz>다. 1996년에 코리안 슈퍼세션(Korean Supersession)이라는 프로젝트에 합류하여 발표한 음반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음악인으로 장수하는 비결은…
그가 KBS관현악단장을 맡은 것은 1995년으로 올해로 9년째다. 그가 지휘하는 악단은 음반 그대로 편곡하지 않아서 가수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까다로운 그에게 “후배 음악인들에 해줄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지금은 여건이 좋고 컴퓨터는 발전하는데 사람이 발전하지 않아요. 사람이 발전해야지”라고 답변했다. 그렇다고 그가 예술가연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음악을 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는 선택된 사람이다”라는 글귀가 써 있다. 그는 “그 점에서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까다로우면서도 겸손한 면모가 ‘음악인으로 장수하는 비법’이 아닐까. 재능이 있으면서도 성실한 인성 말이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P.S. 2002년 10월 문을 연 정성조의 홈페이지(http://www.jungsungjo.com)에 가면 그의 연주 스케쥴과 편곡한 악보를 볼 수 있다. 최근 그의 연주 가운데 기억해둘 만한 행사는 지난 9월27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울시향 팝스 콘서트 20주년 연주회에서 지휘를 맡은 일일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의 영화음악이 조곡 형식으로 연주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 정중화도 재즈 베이스 연주자로 피아니스트 김상미와 함께 JS 컬처(JS culture)라는 듀엣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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