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고 느리고 간결한 목소리로 비주류 포크 일궈… 록에 음악적 뿌리 두고 기타 반주자로도 활약
새해를 맞이했으니 ‘운수풀이’식으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 물론 심심풀이 이상은 아닌데, 한국의 음악인들 가운데 거물급들이 몰려서 태어난 해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1947년 돼지띠 해에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해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자작곡 가수)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태어나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경험이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한 것일까. 아무튼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오세은, 그리고 조동진이 ‘1947년생’이다.
47년생 싱어송라이터 대열에 합류
조동진을 ‘포크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그를 포크의 영향을 받은 싱어송라이터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흔한 ‘통기타 가수’와는 무언가 다른 비범함을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이 미사리 등지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고 있는 반면, 그는 몇년 만에 한번씩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을 한다. 무거운 침묵 뒤에 나직이, 그렇지만 강렬하게 말 한마디를 던지는 고수 같은 모습이다.
그러니 조동진을 ‘악사열전’에서 다루는 것은 조금은 번지수가 틀린 일이다. 나중에 ‘작가열전’이나 ‘가수열전’을 하게 된다면 그때 더 어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모르는 일이 있다. 그것은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중반부터 ‘보컬 그룹’ 혹은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대광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구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전기기타를 연주하면서 교내 행사 때마다 무대에 섰다. 1972년 한 주간지가 그를 “1인의 그룹사운드”라고 묘사한 것이나, 시나위의 신대철이 “조동진 형의 곡을 밴드가 연주하면 곧바로 록 음악이 된다”고 말한 것은 조동진의 음악적 뿌리를 잘 묘사해준다.
조동진의 부친은 영화감독 조긍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것이나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부친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그는 그룹에 가담하여 미8군 클럽과 종로의 우미회관 등의 무대에 섰다. 이 시절 황규현, 이태원, 전언수 등과 결성한 5인조 그룹 ‘더 셰그린’(The Shagreen)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렀다는 일은 전설 같기만 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 황규현은 1969년 솔로 가수로 ‘전향’해 등을 히트시킨 솔 가수가 되었고, 이태원과 전언수는 ‘쉐그린’이라는 이름으로 포크 듀엣을 결성했다.
셰그린을 마지막으로 그룹에서 연주하는 생활을 그만두면서 그는 학교도 그만뒀다. 팝송을 모방하는 일보다는 “무언가 나의 것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음악”이었다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신촌 로터리에 있는 카페 ‘비잔티움’에서 아르바이트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한때 물 좋고 잘나갔다는 나이트클럽 ‘우산속’이 있던 빌딩에 함께 있던 커피숍이다. 그때 그곳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비틀스의 <i follow the sun>, 롤링 스톤스의 <lady jane>, 비지스의 <first of may> 같은 노래를 부르는 키가 큰 장발의 청년을 보았을 것이다.
5인조 그룹 활동… ‘우리 것’을 찾아서
때는 마침 ‘통기타 포크송’의 전성시대였다. 조동진 역시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민기, 양희은 등과 어울렸지만, 그는 ‘쎄시봉’에서 ‘오비스 캐빈’으로 맥을 이어가던 포크송의 주류와도 거리가 있었다. 그 대신 그는 나현구가 경영하던 뚝섬(성수동)의 오리엔트 스튜디오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작곡을 하면서 ‘기타 반주자’로 활동한다. 1972년경부터 그가 작곡하고 기타를 연주한 곡들이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로 녹음되기 시작했다. 1968년에 만든 는 서유석, 김세환, 현경과 영애, 이수만(!)이 불렀고, 1969년에 만든 (작사는 시인 고은)는 양희은이 불렀다. 서유석은 를 불렀고, 김세환은 를 불렀고, 윤형주는 를 불렀고, 송창식은 을 불렀고, 최헌과 투 코리언스(김도향·손장철)는 를 불렀다. 조동진은 자신의 목소리로 를 녹음했다. 이 당시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으로는 유일한 이 음원은 <golden folk album vol.5>라는 ‘옴니버스 음반’에 실려 있다.
한편 그는 강근식(기타), 조원익(베이스), 이호준(키보드), 유영수(드럼), 이영림(퍼커션) 등과 함께 오리엔트 스튜디오의 전속 밴드인 ‘동방의 빛’에서 리듬기타를 맡았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킹 크림슨(King Crimson) 등의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했다는 이때의 실험은 (1980) 같은 조동진의 숨겨진 명곡에서 다시 한번 발휘된다(이 당시 동방의 빛의 ‘증거물’로는 송창식의 공연에서 을 연주한 불완전한 음원이 남아 있다. 물론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수고를 해야 한다). 군대 문제로 인해 조동진이 동방의 빛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이때 맺은 인맥은 뒤에 그가 솔로로 활동할 때 든든한 힘이 된다.
1975년 말 대마초 파동으로 오리엔트 프로덕션(‘나현구 사단’)이 풍비박산이 난 뒤 조동진은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본인의 표현대로 “조국 근대화와 독재타도의 틈바구니에서 슬쩍 비껴나온 나 같은 장발족”이 설 땅은 협소했다. 그처럼 실내에 칩거하면서 내면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든 시간이 흘러갔다. 후배 이정선의 음반에서 세션으로 기타를 연주해주거나, 강근식이 설립한 CM송 프로덕션 ‘강 프로’에서 CM송을 만들거나 엔지니어를 맡았지만 가장으로서 생계를 해결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라디오 강타한 ‘자연뽕’을 아시나요
결국 “가족 전체가 거리에 나앉을 판이 되었을 때” 그의 정규 데뷔 음반이 발표되었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사원이었던 구자영(뒤에 ‘진양 오디오’의 대표)이 제작을 맡고, 강근식과 조원익 등 동방의 빛 멤버들의 도움을 받아 녹음한 음반은 1979년 을 타이틀곡으로 삼아 소리 소문 없이 발표되었다. 홍보도 없었고 공연도 없었지만 은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히트곡이 되었다. 업계 용어로 ‘자연뽕’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이 곡은 김세환의 목소리로 녹음한 적이 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표하지 못했다. 다른 가수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므로 정작 조동진은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10년의 내공이 담긴 10개의 곡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정갈하고 완벽한 작품이었다. 를 수록한 2집 음반(1980)과 더불어 그의 음반은 1970년의 종언과 1980년대의 시작을 알려주는 듯했다. 실제로 그랬다.
추신- 1월30일부터 2월1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2004 조동진 음악회’라는 소박한 이름의 공연이 열린다. 이 글이 그의 공연을 ‘홍보’하는 내용이 되는 것은 나로서는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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