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 사운드에 바탕한 실험적 음악 선보여… 김정호의 후견인 구실하며 영화음악도 남겨
가을이 겨울로 접어드는 11월은 가수들에게 ‘잔인한 계절’이다. 차중락, 김현식, 유재하, 김성재에 이르는 신·구 가수들이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빠졌다고? 맞다. 1985년 11월29일 타계한 가수 김정호가 빠졌다. 와 로 1970년대 중반을 풍미했고, “간~다”라는 절창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듯한 등 주옥같은 곡을 남긴 바로 그 인물이다. 취향에 따라서는 ‘청승맞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김정호가 뛰어난 작곡가이자 가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당시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음악 명가 출신으로 중3 때 프로 세계로
이번 글의 주인공은 김정호가 아니라 안건마다. 지난번 강근식을 소개하면서 이장희를 먼저 언급했듯 이번에도 역시 음악인을 소개하기 위해 가수를 먼저 소개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김정호의 구슬프고 궁상맞은 노래를 우아하고 품격 있는 대중음악으로 만들어 만인의 사랑을 받게 한 숨은 주역인 안건마의 업적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김정호뿐만이 아니다. 김정호가 만든 곡들로 김정호보다 먼저 스타덤에 오른 어니언스(임창제·이수영)의 음반 역시 ‘안건마 편곡집’이었다. 그 외에도 금과 은(투에이스), 이수미, 석찬, 채은옥, 김인순 등 197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린 ‘포크 가수’(혹은 통기타 가수)들도 한두개씩 ‘안건마 편곡집’을 발표했다. 송창식 같은 거물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가수들의 음반을 편곡하고 연주한 업적이 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안건마의 업적은 이보다 훨씬 광범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계 자체가 음악의 명가다. 연주인이자 악단장인 김광수와 김광빈, 가수 배호, 피아니스트 안마미 등이 그와 친인척 관계로 연결된 인물들이다. 한국에서 현대적 대중음악의 초석을 마련해준 중요한 인물들이다. 안건마 역시 음악인 집안의 피를 물려받아 남산초등학교 시절 마칭 밴드(marching band)에서 고사리손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휘문중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면서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그의 초등학교 동기이고, 역시 바이올리니스트인 김영욱이 중학교 동기였다는 사실은 그의 풍부한 음악성을 만들어준 또 하나의 환경이었다.
이렇게 음악에 미친 소년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직업적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처음 경력을 시작한 곳은 민들레 악단 혹은 나이츠 오브 멜로디(Knights of Melody·멜로디의 기사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빅 밴드’ 형식의 악단이었다. 을지로 6가에 있던 미군 부대인 EDFE(Engineering District of Far East·극동공병사령부)의 장교 클럽에서 5년 동안 활동한 민들레 악단에는 뒤에 서울예고 교장을 역임한 김정길이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포크 가수들의 ‘사감’(舍監)이 되는 평론가 이백천이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다는 흥미로운 내력이 전해내려온다.
안건마는 20살 무렵인 1966년께부터 최상룡이 이끈 6인조 ‘캄보’ 밴드에 들어가 테너 색소폰을 불면서 아스토리아 호텔과 골든서울 나이트클럽 등에서 연주했다. 호텔의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경음악 악단이 전성기를 이루던 때였다. 최상룡은 ‘사랑과 평화’의 리더였던 최이철의 작은 아버지이자 당대의 유명 트럼펫 연주자였다. 그 뒤 몇개 악단을 거친 뒤 자신의 악단(‘안건마 악단’)을 만들어 독립하면서 뉴코리아 호텔과 로얄 호텔의 나이트클럽 등에서 연주인 생활을 계속했다. 생계가 넉넉지 않던 시절이라 낮에는 문화방송의 전속악단에서도 연주하는 바쁜 삶이었다.
테너 색소폰 연주자… 정통 음악을 모던하게
그 무렵 20대 초반의 나이에 자기 악단의 ‘마스터’가 된 사람은 안건마와 정성조 정도였고, 실제로 두 사람은 ‘젊고 실력 있는 음악인’으로 입소문이 났다. 클래식과 재즈에 기초를 두고 화성학과 편곡 등 이론에 강하면서 피아노와 색소폰을 연주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음악을 ‘정통’으로 추구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을 지녔다는 점도 공통적이었다. 그래서 ‘경음악 악단’인 안건마 악단은 ‘그룹사운드’와도 교류가 많았다. 로얄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던 시절 최이철과 이남이가 이끌던 영에이스(사랑과 평화의 전신)와 자주 즉흥 잼(협연)을 했다는 일은 전설처럼 전해내려온다.
▷ 어니언스 (애플/유니버어살, K-Apple 785, 1973/1974), 김인순 (애플/유니버어살, K-Apple 792, 1974), 안건마 <tenor sax>(애플/유니버어살, K-Apple 799, 1976), 김정호 (애플/유니버어살, K-Apple 792, 1975).(맨 위부터 아래로)</tenor>
당시 여러 통기타 가수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DJ 이종환이 찾아온 것은 안건마 악단이 로얄 호텔에서 연주할 때다. 그 뒤 안건마는 이종환의 처남 김웅일이 경영하던 애플 레코드에서 발매한 많은 음반들에서 편곡과 디렉팅을 맡으면서, 어니언스의 와 를 필두로 ‘이종환 사단’의 수많은 히트곡을 조련해냈다. 아마도 안건마는 김희갑의 뒤를 이어 ‘마장동 스튜디오’(유니버어설 스튜디오)를 가장 많이 드나든 인물일 것이다.
안건마의 편곡은 언뜻 ‘스탠더드’하게 들린다. 그래서 그가 편곡을 맡은 음악에 대해 ‘포크를 가요로 만들었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이런 평은 ‘그가 없었다면 포크가 대중음악으로 성공하기 힘들었다’는 말의 방증일 것이다. 게다가 그의 편곡은 단지 스탠더드한 것도 아니다. 드럼, 베이스, 기타의 합주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우아한 피아노의 타건, 서정적이고 두터운 현악, 그리고 색소폰, 플루트, 트럼펫 등 관악기가 혼합된 감성적 사운드는 한국에서 음반의 역사(혹은 레코딩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었다. 또한 야마하 오르간에 레슬리 스피커를 연결해서 만들어낸 독특한 사운드나 전기 기타에 플랜저(flanger) 이펙트를 입혀 만들어낸 독특한 톤 등은 그의 실험가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 뒤 안건마는 음반 녹음과 영화음악 작업 등으로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히트곡 몇개가 들어오니까 여기저기서 제의가 들어와서 정신없이 여러 개 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그는 회고한다. (1973)이나 (1977) 같은 영화를 기억한다면 안건마라는 이름 석자를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큰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어니언스), (김정호), (현혜미, 주제곡), (이태원)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70년대의 번민 끝에 종교인으로 새 삶
그러던 그는 1980년 6월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 유학도 아니고 이민이었다. 1980년대에는 워싱턴주의 시애틀과 타코마의 한인 사회에서 음악인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변에서도 그에 대한 소식이 뜸하게 전해지더니 뉴욕으로 이주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젊었을 때는 왜 그렇게 번민이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 지금 그의 소회다. “그때 제가 했던 일을 숨기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그때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는 것이 그의 변이었다. 예민한 감성의 음악인에게 한국의 1970년대는 깊은 고뇌와 번민을 던졌던 모양이다. 절대적 구원자를 찾기 전에는 해결할 수 없는 번민을. 그렇지만 ‘새 삶’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긴 탄식처럼….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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