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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하] 영화를 보면 그가 들렸다

등록 2004-02-27 00:00 수정 2020-05-03 04:23

탄탄한 음악이론으로 한국 사운드트랙 걸작 내놓아… 편곡의 진수 선보이며 직 · 간접 문하생 수두룩

신병하는 ‘선생님’이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나이든 음악인에게 붙이는 의례적인 호칭이 되었지만, 신병하의 경우는 정말 선생님이다. 그가 한국 대중음악계의 보기 드문 ‘이론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와 나이 차가 많지 않은 동료 음악인들도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농담이든, 진담이든.

클래식·재즈·국악 등 넘나든 ‘선생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생소하다면 영화음악부터 소개할 필요가 있다. 등 1980년대 한국영화 걸작들의 사운드트랙을 만든 주인공이 신병하다. 직접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클래식·재즈·국악 등의 음악 이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만들어내기 힘든 음악이다. 드라마의 경우에도 1987년 문화방송 주말 드라마였던 , 그리고 베스트셀러극장으로 방영된 의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이 그의 것이고, 1990년대 이후에도 (1995, SBS), (1997, 문화방송)의 음악이 그가 그린 악보를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가수를 키운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이동원, 이미배, 주정이(산이슬) 등이 ‘신병하 작편곡집’을 발표한 이들이다. 그리고 누군가 빠뜨린 것 같다. 다름 아니라 윤시내다. 혹시 1978년 문화방송에서 개최한 서울 국제가요제를 본 사람이라면 윤시내가 부른 라는 곡을 듣고 적잖이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처럼 분장한 여가수가 허스키 보이스로 샤우팅을 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브레이크가 걸리는 펑키한 리듬과 관악기의 취주도 그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이 곡은 훗날 윤시내의 대표곡이 된 를 작곡한 최종혁의 작품이지만, 편곡을 해준 배후의 인물은 따로 있었다. 그가 바로 신병하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윤시내를 거느린 신병하의 그룹 사계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앳된 나이의 윤시내의 모습, 그리고 젊은 시절의 유현상(!)의 모습은 옆에 놓인 사계절의 유일한 정규 음반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로 이름을 알린 뒤 윤시내가 TV에 나와서 쉽게 부르기 어려운 팝송을 멋들어지게 부른 기억이 있다면, 윤시내가 내공을 쌓은 곳이 바로 사계절이라는 그룹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겠다. 사계절은 오비스 캐빈과 포 시즌스 등 명동의 다운타운에서 활동한 존재였고, 신병하와 사계절은 (지난번 소개한) 정성조와 메신저스와 더불어 복잡하고 어려운 편곡을 음악을 들려주는 그룹으로 정평이 있었다. 물론 그룹의 일원이던 윤시내의 무명 시절의 노래 솜씨도 사계절의 음악을 빛내준 요소였다.

미8군 베이스 주자… 그룹 사계절의 전설

이렇게 1980년대 이후에는 영화음악가로 활동하고, 1970년대 후반에는 그룹을 이끌고 활동했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 1945년생인 그의 경력은 기지촌 클럽과 미8군 무대를 거쳤던 한국 록 음악의 1세대의 경력과 그리 다르지 않다. 1965년에 친구들과 함께 진명여고 강당인 삼일당을 빌려 ‘재즈 페스티벌’을 개최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아마도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 개최한 조촐한 행사로 짐작된다. 물론 그의 음악적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 뒤 기지촌 클럽을 거쳐 미8군 무대에 들어가서 1967년에는 원 밴드(A One Band), 1968년에는 올 스타 쇼(All Star Show), 1969년에는 슈퍼 스타 쇼(Super Star Show)에서 베이스 주자로서 연주인 생활을 계속했다.

<font color="#216B9C">☞ 윤시내외 <hit rotary vol.1>(서라벌, SLK-1012, 1976)</hit>, 사계절 (서라벌, SLK-1012, 1976), 신병하와 사계절 (뒷면) (지구레코드, JLS 1201426, 1978), 주정이 (대성음반, DAS-0003, 1981), 신병하 (서라벌, SRB-SE 007, 1991)</font>

신병하가 다른 사람과 달랐던 점이 있다면 1969년 한 사건으로 큰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8군 무대에 새로 부임해온 심사위원장이 “한국의 연주인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왜 죄다 앵무새처럼 흉내만 내고 있느냐”고 말하더니 “1969년 2월 이후에 발표된 곡으로 99곡을 편곡하여 제출해라. 그 이전 것은 전부 무효다”라고 말했다는 것. 똑같이 연주하는 것에는 능했지만, 개성 있게 편곡해서 연주하는 일에는 낯설었던 당시 미8군 무대의 한국 연주인들은 당황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신병하는 ‘열심히 공부하는’ 음악인이 되었다. 신중현, 김희갑을 비롯하여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이교숙(해군 군악대장 출신이자 당시 이화여대 교수)으로부터 5년 동안이나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사계절의 음악은 이런 이론적 공부가 가져다준 하나의 결실이었다. 사계절은 당시 모든 그룹이 그랬듯 잦은 멤버 교체로 인해 단명하고 말았지만, 윤시내와 유현상 같은 가수는 물론 연석원, 김희현, 김현배 등 실력 있는 연주인들이 거쳐간 그룹으로 남아 있다. 사계절이 해체된 뒤인 1979년에는 신스 미스틱 무드 오케스트라(Shin’s Mystic Mood Orchestra)의 악단장을 맡아서 이후 전개할 음악 세계를 실험하기도 했다.

150여편의 사운드트랙은 교과서였다

신병하가 영화음악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의 영화음악을 맡으면서부터다. 그 뒤로 그가 담당한 영화음악은 약 100편, 드라마음악은 약 50편에 이른다. 특히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그가 음악을 맡은 영화마다 흥행에 성공했고, 그 역시 각종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 과정에서 공식적·비공식적으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역할을 계속했다.
신병하는 실기에 뛰어난 연주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한국의 대중음악, 나아가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게 걸쳐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사운드트랙이란 ‘그 장면에서 분명 인상적 음악이 있었는데 정작 음악은 잘 기억나지 않는’ 속성을 갖는다. 신병하의 존재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존재가 분명히 있었다’는 식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선생님’이란 그런 존재다. 다들 자기가 잘나서 잘된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지만….

<table cellpadding="6"><tr><td bgcolor="ffffcc">
<font size="2">☞ ‘신현준의 악사열전’은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60, 70년대 대중음악문화의 변천사를 관심있게 지켜봐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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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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