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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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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철과 그의 동료들(2)] 더 많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등록 2004-01-09 15:00 수정 2020-05-02 19:23

살벌한 환경에서 유일하게 지조를 지켰던 최강의 록그룹,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씨앗을 뿌린다

대마초 파동 뒤 ‘그룹사운드’의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다름 아니라 ‘뽕짝’을 불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한다면 살벌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것이므로 관대하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젊은 음악 팬들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한국 록의 1세대’들이 활동을 정지당하거나 ‘먹고살기 위해’ 가요계에 적응하던 시점에서 유일하게 ‘지조’를 지켰던 존재가 사랑과평화였다.

나이트클럽에서 ‘최고의 몸값’

몇번의 멤버 교체가 있었지만 ‘서울나그네’부터 ‘사랑과평화’로 이어지는 라인업, 최이철(기타), 김명곤(키보드·색소폰), 이남이(베이스), 이철호(퍼커션), 김태흥(드럼)의 라인업은 역대 최강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었다. 당시 ‘재즈 록’이라고 부르던, 지금의 ‘펑키’(funky)나 ‘퓨전’(fusion)의 직계 선조쯤 되는 음악은 디스코 선풍을 견뎌낼 정도로 강인했다. 디스코텍이 등장해 밴드가 라이브로 연주할 공간이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사랑과평화의 음악은 이를 너끈히 극복했다.

사랑과평화의 라인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업소에서 일할 때’는 이탈리아에서 온 사르보(Sarvo)가 베이스를 맡았다는 점이다. 나미의 를 작곡한 프랑코 로마노의 그룹 멤버였던 사르보는 슬랩(일명 ‘초퍼’)이라는 베이스의 선진 주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사랑과평화의 음악에 큰 자극을 주었다. 결국 사랑과평화는 나이트클럽에서 최고의 몸값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1977~78년께 이들이 연주했던 퍼시픽 호텔(퇴계로)의 나이트클럽 무대에 가본 사람은 ‘반쯤만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나머지 반은 무대 밑에서 넋을 읽고 연주를 쳐다보는’ 광경을 기억할 것이다. 즉, 이 자리는 춤추러 왔다가 음악을 감상하고 가는 자리였다.

사랑과평화는 ‘밤무대의 고수’로 머문 것이 아니라 ‘가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이장희가 작곡한 와 를 펑키한 스타일로 편곡한 음악으로 산울림, 활주로, 블랙 테트라 등 ‘아마추어 그룹’의 전성기에 ‘직업적 그룹’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대중적 인기와 젊은층의 지지를 모두 획득했다. 또한 히트곡은 이장희의 작품이었지만 최이철과 김명곤의 자작곡 몇곡도 음반에 수록되어 1980년대 이후의 상황을 예고했다. 또한 등의 클래식을 편곡한 것이나 등의 창작 연주곡은 지금 들어도 놀라운 음악적 센스로 가득하다. 2집부터 이남이를 대신해 베이스를 잡은 송홍섭의 존재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사랑과평화 (지구레코드.JLS1202154.1988), 사랑과평화 (오아시스,OL2974.1989), 사랑과평화 (뉴서울레코드,NSRS-DF01.1992), 사랑과평화 (도레미,DRMCD-1904.2003), 유라시아의 아침


그러고는 시련이 닥쳐왔다. 1980년 8월 ‘제2차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 정지를 당한 뒤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남이가 “떠나보면 알 거야”라고 소리치던 를 작곡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음악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드러머로 꼽히던 김태흥은 1984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뒤로 사랑과평화는 ‘최이철이 업소에서 일하기 위해 모았다가 흩어지는 그룹’이 되었다. 그 와중에 김광민, 정원영, 유현상, 박성식, 장기호 등의 인물들이 그룹을 거쳐갔다. 최이철은 조용필의 일본 공연에 동행하거나 송창식의 의 레코딩에 참여해 명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그룹의 황금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2004, 최이철의 마지막 승부수

그렇지만 사랑과평화는 ‘한동안 뜸하다가 나타나는’ 존재가 되었다. 1988년 돌아온 이남이의 노래 가 예상외의 히트를 기록한 일, 그리고 1989년 장기호의 노래 이 황인뢰 PD가 연출한 문화방송 드라마에 삽입돼 인기를 얻은 일 등이 이어졌다. 히트를 기록한 주역이 그룹을 탈퇴하는 일도 이어졌다. 그 뒤 1990년대 초 이철호가 돌아오고 이병일(드럼), 안정현(키보드), 이승수(베이스) 등 ‘젊은 피’가 수혈되면서 사랑과평화는 1999년까지 안정적으로 활동하면서 7종의 정규 음반을 남겼다. 이러면서 사랑과평화는 자연스럽게 ‘최장수 록그룹’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지금도 이철호는 최장수 록그룹을 이끌고 특유의 정열을 불사르고 있다.
그런데 최이철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을 대표해 ‘환태평양 록 오사카 음악제’에도 출전했고, ‘경주 엑스포’의 특별 무대에도 참여했지만 “1990년대에 나는 슬럼프에 빠졌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이런 활동보다는 재즈 클럽 야누스 같은 곳에서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한국 록의 후배격인 김종서와 들국화의 공연에서 세션으로 연주를 맡은 일도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결국 최이철은 1999년 사랑과평화를 홀연히 탈퇴했다. 한편 김명곤은 지겹도록 악보를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잡아주는 등 몸을 혹사하다가 2001년 9월 유명을 달리했다.
최이철이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은 옛 동료들을 모아 ‘유라시아의 아침’이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하면서부터다. 이 프로젝트는 자신이 이제껏 추구해왔던 음악에 ‘동양 음악’을 퓨전하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서양 음악의 트렌드를 쫓아왔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2002년에 시험판을 발표하고 내년 봄 발매될 음반은 그의 음악 인생의 마지막 승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에게 ‘숙제’ 같기만 했던 ‘우리 것과의 접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한편 이남이는 를 통해 1980년대 말 ‘인기인’이 되었지만 방송계의 변덕스러움과 자기관리 실패 사이의 어딘가에서 방황한 뒤 춘천에 칩거했다. 그 뒤 소설가 이외수 등 그곳에 거주하는 문화인사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은 그는 몇년 전부터 자신의 딸 이단비를 포함한 지역의 음악인과 더불어 ‘철가방 프로젝트’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본인의 변은 “이제까지 첨단적 음악만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촌스러운’ 음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송홍섭의 ‘저주받은 걸작’이여

마지막으로 사랑과평화의 막내격인 송홍섭은 김명곤의 뒤를 이어 편곡자로 이름을 떨친 뒤 송스튜디오(프로덕션)를 차려서 한영애, 신윤철, 유앤미블루, 삐삐밴드, 삐삐롱 스타킹 등을 발굴했다. 이들의 음반은 대부분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리므로 상업적 성과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올해 여름 피닉스(Phoenix)라는 라이브 클럽을 열어 지치지 않는 불사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히피풍’의 이름인 사랑과평화. 절정기에 모였던 인물들은 지금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 각자가 어디에선가 뿌리고 있는 씨앗이 더 많은 사랑과 평화를 낳기를 바랄 뿐이다. 소싯적에 누구나 한번쯤은 꾸어보았던 히피 반문화의 꿈이 그저 ‘아메리칸 드림의 하나의 변종’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계에도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꿈으로 남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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