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러디 머더’, 줄리언 시먼스 지음, 김명남 옮김, 우연한지식 펴냄, 2026
직업군마다 즐기는 책이 있다. 역사학계에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많다. 젊은 시절부터 영미권의 고전을 읽어온 분부터 일본의 최신 소설을 챙기는 분까지, 주변에만 서너 명의 ‘덕후’가 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누가 봐도 역사학자의 작업은 탐정의 그것과 비슷하니 말이다. 탐정이 한정된 단서를 가지고 범인을 찾아가듯, 역사학자는 과거의 사료를 읽어가며 진실에 다가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얼마 전 추리소설과 역사학의 친연성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떠올렸다. 추리소설의 역사를 정리한 줄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김명남 옮김, 우연한지식 펴냄, 2026)를 읽으면서다. 지은이는 추리소설가이자 10년 동안 ‘선데이타임스’에서 추리소설 서평가로 일한 ‘업계인’으로, 첫머리부터 자신이 추리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서를 쓰려는 게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렇기에 책은 딱딱한 연대기나 ‘정전’(正典)의 목록보다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혹은 장(場)에 대한 내밀한 보고서처럼 읽힌다. 토머스 쿤이나 피에르 부르디외가 좋아했을 법한 책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추리소설은 근대의 동화다. 범죄 전모가 드러나고 악인이 처벌받는 추리소설의 내러티브는 도시 생활의 불안과 긴장을 달래는 효과적인 환상이었다. 탐정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악의 냄새를 맡고, 그 근원을 집요하게 추적해 끝내 뿌리 뽑고야 마는 주술사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오늘날 추리소설의 원형은 18세기 말 처음 등장했는데, 주인공은 경찰이나 탐정이 아닌 범죄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체제의 수호자보다 이를 우회하거나 교란하는 악동을 훨씬 좋아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경제력을 갖춘 대중의 등장과 경찰 제도의 확립, 도시 범죄의 증가는 문학에 오락적 재미와 더불어 지금의 세계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요구했다. 추리소설은 이에 가장 완벽하게 부응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범죄자에서 경찰과 탐정으로 바뀌었다. 배경은 점차 시골의 외딴 별장과 같은 고립적인 공간으로 이동했다. 점점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어지는 도시와 대조적으로, 이들 공간은 완벽하게 통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실험실이자 케이지였다. 그렇게 추리소설은 폐쇄된 유토피아에서 벌어지는 수수께끼 풀이로 변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십자말풀이가 된 추리소설에 일대 충격을 가했다. 최소한 1890년대부터 추리소설이 제공해온, ‘안심해도 좋을 세계’라는 환상이 무너졌다. 초점은 수수께끼보다 세계 자체로 이동했다. 탐정은 초인 자리에서 내려왔고, 더 많은 등장인물의 복잡한 심리와 내면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이 중시됐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보다는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지가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탐정소설에서 범죄소설로 추리소설의 성격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20세기 역사학자의 작업도 추리소설, 정확히는 탐정소설과 비슷했다. 과거의 사료라는 별장에서 진실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물론 오늘날 역사학에 ‘안심해도 좋을 세계’란 없다. 완벽하게 고립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역사가는 사료 하나를 다루는 데도 안팎의 온갖 요인을 고려한다. 무엇보다 어두운 비밀을 밝히고 범죄자를 처단하면서까지 지켜내야 할 질서가 없다. 탐정소설에서 범죄소설로 추리소설의 패러다임이 이동했듯, 역사학의 성격 역시 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추리소설 마니아인 역사가를 찾아보기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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