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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를 너무 쉽게 봤어!

발레와 격투기의 이질적인 조합… 영화 ‘발레리나’ 속 이브가 보여주는 반전 매력
등록 2026-04-10 10:05 수정 2026-04-11 17:44
영화 ‘발레리나’에서 주인공 이브는 ‘여자처럼 싸우라’는 교관의 한마디에 각성해 작은 체구와 힘의 열세를 극복한다. 판시네마 제공

영화 ‘발레리나’에서 주인공 이브는 ‘여자처럼 싸우라’는 교관의 한마디에 각성해 작은 체구와 힘의 열세를 극복한다. 판시네마 제공


 

“플리에, 탕뒤, 그랑플리에….”

발로 스텝을 밟으면서 머리로는 20세기에 배운 프랑스어의 의미를 유추했다. 유리로 된 통창으로 햇볕이 쏟아지고 고양이의 걸음 같은 왈츠곡이 울려 퍼지는 곳. 누가 더 압도적인 힘과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지 겨루는 매트와 가장 동떨어진 장소가 있다면 발레교습소가 아닐까?

발레와 격투기,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세계가 영화 ‘발레리나’에서 만난다. ‘발레리나’는 전설적인 킬러 존 윅이 주인공인 액션영화 ‘존 윅’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개봉과 동시에 화제를 모았다.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한 주인공 이브는 존 윅을 배출한 암살자 양성 조직인 ‘루스카 로마’에서 발레리나이자 킬러로 성장한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자들을 쫓다가 거대한 범죄조직의 근거지로 잠입한다.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힘겹게 싸우는 이브의 눈앞에 존 윅이 나타난다.

 

복수 위해 킬러가 된 발레리나

 

발레리나가 킬러가 되는 영화의 핵심 설정은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 ‘레드 스패로’의 주인공 도미니카는 발레리나였다가 스파이로 전향하고 마블의 히로인인 블랙 위도 역시 어린 시절엔 발레리나였다. 이는 역사적인 근거가 뒷받침된 설정이라기보다 발레리나가 체력적으로 단련된 여성이라는 점, 또 격투기가 그와 상반된 발레를 만났을 때 유발되는 신선함, 볼거리 등을 겨냥한 노림수라고 볼 수 있다. 실제 냉전시대 러시아에서는 국외 순방이 잦고 외국인과의 접촉이 많은 발레리나들의 동향을 철저히 감시했다고 한다.

“이런 삶을 물려주기 싫었다”는 아버지의 유언이 무색하게 이브는 발레와 살인 기술을 함께 배우며 분노를 쏟아낸다. 영화 초반 그는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다가 여성 교관의 말 한마디에 각성한다. 교관이 이브에게 한 말은 ‘여자처럼 싸워라’(Fight like a girl)다. 작은 체구와 힘의 열세가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이브는 관점을 바꾸면서 발레와 격투기 모두 몰라보게 실력이 좋아진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처럼 발레리나가 킬러로 활약하는 게 정말 가능할까? 호기심을 해소할 목적으로 집 근처에 있는 발레교습소의 초급자 수업에 참여했다. 총 90분 수업에서 초반 30분은 밴드와 폼롤러를 이용한 스트레칭에 집중했다. 나머지 60분은 바를 잡고 박자에 맞춰 기본적인 스텝을 연습했다.

 

‘여자처럼 싸워라’의 숨은 속내

 

‘발레’ 하면 떠오르는 발가락 끝을 세워 서는 동작은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발가락 끝으로만 서면 접지면이 좁아지는데, 이런 자세로 무게중심을 옮기면 균형을 잃기 쉽다. 넘어지지 않으려 양손으로 바를 꼭 잡은 채, 개중에 능숙한 사람을 보며 스텝을 따라 했다. 바닥에서 발을 뗄 때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마치 걸음마를 새로 배우는 기분이었다. 거울을 보며 기본동작을 반복하고 자세를 조금씩 수정하는 건 복싱 훈련법과 비슷하다. 물론 발레교습소는 복싱장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따뜻하고 조용하지만.

영화 ‘발레리나’의 주인공 이브는 ‘루스카 로마’에서 발레리나이자 킬러로 성장한다. 판시네마 제공

영화 ‘발레리나’의 주인공 이브는 ‘루스카 로마’에서 발레리나이자 킬러로 성장한다. 판시네마 제공


스텝을 밟으며 들었던 생각은 이 방식으로 오랫동안 훈련하면 하체 힘이 굉장히 강해지겠다는 거였다. 하체와 코어 근육의 힘을 강하게 써야 동작을 크고 분명하게, 더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 발가락을 세운 불안정한 자세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데 익숙해지면 이는 격투기에서 말하는 ‘베이스가 좋은 경지’에 이르는 셈이다. 격투기에서 베이스가 좋다는 건 자유자재로 무게중심을 바꿔가며 상대의 힘에 밀리거나 제압당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뜻한다. 베이스가 좋은 사람은 균형을 잃어도 금방 회복하고 상대의 체중이 한쪽으로 쏠리는 시점에 이를 역으로 이용해 공격한다. 예를 들면 되치기 같은 동작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런 이상적인 경지에 이르기 위해 선행돼야 하는 것이 하체와 코어 힘이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에서도 이브의 엄청난 하체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브가 적의 근거지에 침투해 카페테리아에서 혈투를 벌이는데, 그는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쯤 큰 남성의 상체에 오직 하체 힘으로만 매달린다. 이렇게 상대의 한쪽 팔과 어깨를 두 다리로 묶은 채 거꾸로 매달리는 자세는 주짓수의 주요 기술인 트라이앵글초크(두 다리로 삼각형 형태를 만들어 상대의 경동맥을 조르는 기술)의 시작 자세다. 남자는 이브를 떼어내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발레로 단련된 이브는 하체와 코어 힘으로 버티다가 상대의 노출된 한쪽 팔을 붙잡고 암바(지렛대 원리를 활용해 팔 관절을 가동 범위 밖으로 꺾는 주짓수 기술)로 꺾으면서 시퀀스를 완성한다.

 

발레,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후반부로 갈수록 치열해지는 이브의 액션은 발레리나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을 살려 전반적으로 안무같이 리듬이 있고 화려하다. 격투기와 발레의 이질적인 조합은 극도의 기술적인 움직임이라는 특수성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격투기는 안무가 아니지만 발레에 서사가 있듯 타격과 방어에도 흐름이 있다. 액션과 리액션을 주고받다가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고 항복을 받아내는 서브미션으로 마무리된다.

발레는 가볍고 유연하고 날렵하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약하고 유순하지만 그것은 발레의 외피에 불과하다. 모든 발레리나는 가볍고 유연한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강함을 뒤로 숨기고 있다. ‘여자처럼 싸우라’는 말이 이브의 내재된 힘을 일깨우고 영화는 가벼움에 가려진 강인함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내세운다. 그와 함께 이브의 처연한 눈, 그 속에 가득 찬 분노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양민영 주짓떼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액션 읽는 여자: 여성 주연 영화를 보며 여성의 시선으로 ‘싸우는 몸’을 발견하는 시간. 여성의 몸을 향한 협소한 시선을 확장하는 칼럼. 4주마다 연재.

 

■영화 ‘발레리나’에서 주인공 이브의 트라이앵글초크-암바로 이어지는 시퀀스 https://youtu.be/DKJ6_caDTNc?si=sMmy6DdfFXMz2bhf

 

자기방어 팁-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범죄 상황에서 가해자들은 범행 대상을 넘어뜨리려 한다. 상대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 발길질하거나 위에 올라타서 체중으로 짓누르거나 고립된 장소로 끌고 가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해 손목이나 팔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긴다.

이런 상황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려 단단하게 고정하고 스쾃 자세처럼 중심을 낮추면서 하체와 코어 힘을 써야 한다. 상체는 상대가 끌어당기는 방향과 반대로 기울이면서 온몸으로 버티는 게 포인트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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