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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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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몸을 다시 자기편으로

단순 복수극 넘어 성폭력 피해자가 주체적으로 맞서는 영화 ‘리벤지’
등록 2026-05-07 20:47 수정 2026-05-13 14:59
영화 ‘리벤지’의 한 장면. 주인공 젠은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 남성들의 취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 복수한다. 네이버 영화 갈무리

영화 ‘리벤지’의 한 장면. 주인공 젠은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 남성들의 취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 복수한다. 네이버 영화 갈무리


복수에 관한 영화가 좋았다. 주인공의 분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리고 복수가 선사하는 쾌감에 매료됐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반복해 접하면서 여성의 복수와 남성의 복수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우선 복수의 계기가 다르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은 원수에 의해 상징적 죽음을 맞는데 남성이 부모나 스승의 죽음, 가문의 몰락으로 인해 죽는다면 여성은 육체가 훼손되면서 죽는다. 여성이 복수를 결심하는 계기 가운데 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건 성폭력이다. 때로는 아이가 납치되거나 죽기도 하지만 여성에게 자녀는 분신 혹은 육체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리벤지’의 핏빛 복수도 시작은 성폭력이다.

 

핏빛 복수의 시작

 

주인공인 젠은 유부남 애인인 리처드와 함께 사막으로 사냥 여행을 떠난다. 원정 사냥은 남자들의 연례행사였고 그날 밤 파티에서 그들은 젠에게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다음날 리처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젠은 리처드의 두 친구에게 성폭행당한다. 도망치는 젠을 세 남자가 뒤쫓던 중, 리처드가 젠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린다. 죽은 줄 알았던 젠은 간신히 살아남고 복수를 시작한다.

‘리벤지’는 여성 복수극의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클리셰를 피해가며 새로운 주인공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하게 활용되는 소재가 사냥이다. 욕망의 대상이던 젠의 몸이 은폐해야 할 범죄의 증거가 되면서 남자들은 포식자가 먹잇감을 쫓듯 추격에 나선다. 그러나 젠이 가해자 중 가장 허술한 남자를 죽임으로써 상황은 역전된다. 젠은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신한다.

변신의 공간은 동굴이다. 동굴은 신화의 영웅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공간으로 무덤이자 자궁을 상징한다. 젠은 그 안에서 리처드가 준 강력한 환각제의 기운을 빌려 훼손된 몸을 복원한다. 불과 금속으로 몸을 재조립하고 고통과 두려움이 뒤섞인 환각을 보는 장면은 환상적으로 연출된다.

특히 복부를 관통한 나뭇가지를 뽑아내고 불에 달군 맥주캔으로 상처를 지지는 대목은 신화적이기까지 하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 커다란 상처에 마초적 이미지의 맥주 로고인 불사조 문양이 인장처럼 남는다. 훼손당한 여성의 몸이 원래대로 말끔하게 복구되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직접 몸을 복원하면서 상처의 주인이 된다. 또 우연이지만 상처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주인공은 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판타지와 현실 경계

 

여성 복수극으로 유명한 작품 가운데 성폭행당한 여성의 고통을 오래 보여주는 영화도 있다. 이어지는 복수도 남성의 시선과 욕망을 따른다. 애초에 남성은 명예가 추락하면 죽고 여성은 육체가 훼손되면 죽는다는 설정부터가 다분히 현실적이면서 여성혐오적이다. 여성에게 육체가 전부라는 고정관념은 복수의 당위성을 확보하기도 한다. 남자들에게 유린당한 여성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 복수가 아무리 잔인해도 당위성이 저절로 확보된다. 오히려 피해 여성이 더 강하고 악랄해질수록, 또 복수의 방식이 기발할수록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커진다.

그러나 정작 피해 여성이 어떻게 힘을 되찾고 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지, 그 과정에 집중하는 영화는 드물다. ‘리벤지’의 감독 코랄리 파르자는 여성의 고통을 흥분의 재료로 소비하는 대신 훼손된 몸이 어떻게 다시 기능하고 싸우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그는 차기작 ‘서브스턴스’에서 여성의 욕망, 섹슈얼리티, 육체를 한층 더 과감하게 다루며 성공 궤도에 오른다.

본격적으로 남자 사냥에 나선 젠은 처절한 방식으로 가해자들과 싸운다. 그는 자신을 얕잡아보며 무작정 덤벼드는 남자들과 다르게 그들의 취약한 곳을 골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첫 대결에서 젠은 단도로 남자의 두 눈을 찔러 치명상을 입힌다. 두 번째 사냥부터는 총을 쓰지만 젠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맨발인 남자가 날카로운 유리를 밟도록 유도한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하고 위협적인 사냥감인 리처드와의 대결에서는 총상으로 벌어진 복부의 상처를 손으로 잡아 뜯다시피 하며 승기를 잡는다.

이 싸움이 흥미로운 건 주인공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젠은 자신보다 강한 남자들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시야, 발, 상처, 자만심과 두려움처럼 구체적인 약점을 노린다. 이는 자기방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제아무리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상대에게도 취약점은 있다. 손가락 같은 작은 관절을 꺾거나 급소를 찌르거나 이미 다친 부위를 세게 차거나 물어뜯는 등 확실하게 타격을 줄 방법을 재빨리 떠올리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싸움은 결코 정정당당하거나 멋지지 않다. 오히려 치사하고 쩨쩨하게 싸울수록 승률이 올라간다.

 

복수 넘어 생존 완성

 

젠이 남자를 한 명씩 죽일 때마다 그들이 가진 무기, 이동 수단, 식량을 모조리 회수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는 첫 번째 사냥감에게서 총·칼·식량을 빼앗고 두 번째 사냥감한테 자동차를, 마지막 사냥감에게선 집을 확보해 요새로 삼는다. 잠재된 생존 본능이 그 잠깐 사이에 완벽하게 깨어난 것이다.

젠은 복수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오직 핑크색 네일과 별 모양의 귀걸이만이 그가 여전히 같은 몸의, 같은 사람임을 말해준다. 달라진 것은 몸이 아니라 몸의 위치다. 욕망의 대상이던 몸, 쫓기던 몸은 끝까지 싸우는 몸, 살아남는 몸이 된다. ‘리벤지’의 쾌감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죽이는 순간이 아니라 피해자의 몸이 다시 자기편이 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양민영 주짓떼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액션 읽는 여자: 여성 주연 영화를 보며 여성의 시선으로 ‘싸우는 몸’을 발견하는 시간. 여성의 몸을 향한 협소한 시선을 확장하는 칼럼. 4주마다 연재.

 

자기방어 기술 - 낭심차기

 

남성의 신체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는 낭심이다. 그렇다면 낭심차기는 가장 효과적인 공격 기술인가?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낭심은 외부 충격에 극도로 취약해 제대로 공격하면 치명적이고 영구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러나 발차기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 한 발을 들고 한 발로 균형을 잡으며 낭심이 위치한 부위를 정확히 차기는 쉽지 않다. 킥복싱·무에타이로 발차기를 배우거나, 낭심 보호대를 차고 낭심차기를 훈련하는 크라브마가를 익혀두는 것도 방법이다. 훈련만 돼 있다면 낭심차기보다 더 좋은 자기방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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