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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 맞서, 묵직하게 용기 있게

여성 주연 격투 영화 클리셰 비켜가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새로 쓰는 ‘아버지’-‘여성 후계자’ 서사
등록 2025-11-20 22:06 수정 2025-12-15 16:45
프랭키는 매기를 거부하다 제자로 받아들이고 매기에게 ‘모 쿠슐러’(게일어로 ‘혈육’이란 뜻)라고 쓰인 망토를 선물한다. 네이버 영화 갈무리

프랭키는 매기를 거부하다 제자로 받아들이고 매기에게 ‘모 쿠슐러’(게일어로 ‘혈육’이란 뜻)라고 쓰인 망토를 선물한다. 네이버 영화 갈무리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전개 및 주요 장면에 대한 정보가 포함돼 있습니다.

 

모든 체육관에는 관장의 후계자가 있다. ‘선수를 키운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코칭은 교육뿐만 아니라 돌봄이 동반되는 양육과 비슷하다. 관장의 후계자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20대 초중반의 젊고 운동능력이 뛰어나며 성별은 예외 없이 남성이다. 이들은 체육관에 살다시피 하며 몸으로, 정신으로 관장의 모든 것을 배운다.

여자라서 안 키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서른두 살인 여성 복서가 남성 코치의 후계자가 되는 영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하나뿐인 딸에게도 외면당한 채 외롭게 사는 복싱 코치 프랭키에게 매기가 찾아온다. 프랭키는 매기를 거부하다가 제자로 받아들인다. 둘은 승승장구하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함께하지만 매기가 경기 중에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크게 다친다. 전신이 마비된 매기는 프랭키에게 자신의 삶을 끝내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는 온통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복싱은 어떤 운동보다 비예측성이 강하다. 복싱의 메커니즘을 수행하자면 몸에 익은 나만의 리듬이 있어야 하고 상대의 리듬도 읽어야 하며, 잽을 던질 차례인데 훅으로 바꾼다든지 하는 속임수로 상대의 예측을 배신해야 한다.

그런데 워낙 한정적 기술로만 싸우기 때문에 상대도 이미 수를 읽고 있어 공격이 제대로 먹히기 쉽지 않다. 이럴 땐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 파고들 공간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내 주먹은 상대에게 닿지만 상대의 주먹은 나에게 닿지 않는 곳(이를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고 한다)에서 강력한 한 방을 뻗는 사람이 경기에서 이긴다.

프랭키는 평생 복싱밖에 몰랐고 비예측성이라면 누구보다도 익숙하다. 그러나 매기는 예측 밖에 있는 인물이다. 선수를 해본 경험이 없고 나이도 많다. 이뿐만 아니다. 프랭키가 말하길 매기는 항상 ‘왜’라고 질문한 다음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간다. 고집 센 복서 사이에서도 고집이 상당하다.

프랭키는 이 만남이 비극을 낳을 걸 알았을까? 첫 만남에서 온몸으로 매기를 거부한다. “여자는 안 키운다”고 했지만 비단 성별의 문제는 아니다. 프랭키는 매기를 키우게 되면 딸과의 실패한 관계, 영화에서 ‘지혈이 되지 않는 상처’라고 표현한 평생의 상처가 들쑤셔질 것을 예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매기가 프랭키의 제자가 되고 이어지는 경기 장면은 여성이 주인공인 격투 영화의 클리셰를 비켜간다. 감독은 여성의 가볍고 빠른 움직임 대신 둔탁한 효과음과 함께 묵직한 주먹에 맞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보통 영화에서 여성이 얼굴을 집중적으로 맞거나 피 흘리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이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가장 예측 불가능한 건 역시 ‘운명’

매기의 눈부신 활약도 이변이다. 프랭키에게 매기는 영화 제목처럼 ‘1달러짜리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발견한 100달러짜리 보물’, 즉 뜻밖의 행운이자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매기에게 ‘모 쿠슐러’(게일어로 ‘혈육’이란 뜻)라는 이름을 주고 후계자로 삼는다.

영화를 여러 번 보지 않는 편인데 유독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본 이유는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두 사람의 독특한 관계성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나는 후계자의 대척점에 서 있다. 후계자가 될 수 없는 나의 한계를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서 애초에 나를 끌어줄 지도자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도 않았다.

슬프게도 이는 체육관에서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여성을 남성만큼 공들여 키우지 않는 건 어느 공동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여성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방치되다시피 하며 상징적인 고아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여성이 아버지의 정식 후계자가 된다.

이대로 서사가 끝나면 해피엔딩이지만 여기에 ‘항상 너를 보호하라’라는 신탁이 끼어든다. 매기는 결국 신탁을 어겨 날개가 꺾이는데 사실 매기는 신탁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보호하지 않는 습관을 고치려고 오른손에 반창고를 감아 턱 아래에 고정하고 연습할 정도로 보스(매기는 프랭키를 이렇게 부른다)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보스가 지어준, 뜻도 모르는 이름마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룰을 지켜도, 밤을 새우며 연습해도, 코치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응해도, 운명이 모든 걸 무너뜨리기도 한다. 영화는 이 절대적인 삶의 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경기 중 부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전신마비 상태에 이른다. 복싱, 링 위의 승부, 한 인간의 고집도 예측 불가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예측 불가능한 건 역시 운명인 걸까?

매기에게 삶을 끝내달라는 부탁을 받은 프랭키는 신부에게 이 일을 털어놓는다. 신부는 운명에 맞서지 말라고 경고한다. 운명에 맞서는 자에겐 파멸뿐이다. 그러나 프랭키는 매기가 망가졌을 때 자신도 망가졌고 이대로 운명에 얻어맞기만 하다가는 영원히 회생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매기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하나뿐인 ‘모 쿠슐러’의 고집을 꺾지 않고 지켜준다.

서로에게 보여준 용기, 사랑

운명 앞에 선 인간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복서라면 발을 빠르게 놀려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프랭키는 그 작은 틈을 파고들어 한 방을 날린다. 상대를 이길 수 없고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지만 그는 싸웠고 지혈되지 않던 상처를 극복한다. 고통이 가득한 삶에서 그래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여준 용기, 그리고 사랑일 것이다.

 

양민영 주짓떼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액션 읽는 여자: 여성 주연 영화를 보며 여성의 시선으로 ‘싸우는 몸’을 발견하는 시간. 여성의 몸을 향한 협소한 시선을 확장하는 칼럼. 4주마다 연재.

 

자기방어 팁 - 클린치, 거리를 좁혀 주먹을 피하라 

격투기를 접한 적이 없는 대다수 여성은 상대가 주먹을 뻗으며 다가올 때 멀어져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거리를 벌릴 수 없는 상황에서 방어하지 못하고 당황한다.

이럴 때 클린치를 이용할 수 있다. 클린치는 상대에게 붙어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피하는 기술이다. 권투 경기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인 선수가 상대 선수의 몸통을 껴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클린치의 목적은 거리를 좁혀 강력한 펀치를 피하는 것도 있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 있다. 보통 어깨와 골반이 회전하지 못하면 펀치를 날릴 수 없다. 이 원리에 따라 상대의 허리를 안고 골반을 밀착해 골반이 회전하는 것을 막고 머리로는 상대의 턱과 어깨를 밀어 어깨의 회전을 제한하면, 상대는 주먹을 뻗을 수 없고 균형을 잃은 채 쓰러지기도 한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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