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영춘권’에서 엄영춘은 다양한 손기술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영화 ‘영춘권’ 화면 갈무리
중국의 여러 권법 가운데 서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영춘권은 이소룡이 배운 권법으로 유명하다. 영춘권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것은 ‘엄영춘’이라는 여성이 창안했다는 설이다. 무예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여성 기원설이다.
엄영춘은 중국 광둥성의 두부 장수인데 어느 날 도적떼가 그가 사는 마을을 습격한다. 도적들의 두목은 영춘에게 강제로 혼인을 요구하고 영춘은 소림의 권법을 배워 그들을 물리친다. 훗날 그는 이 권법을 바탕으로 무술을 창안해 여성들에게 전수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영춘권’이라고 불렀다.
1994년 개봉한 영화 ‘영춘권’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주인공 영춘은 남장한 채로 두부를 팔고 무예가 뛰어나 마을에 출몰하는 도적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한다. ‘영춘권’은 1990년대에 많이 제작된 무협 코미디 영화로 영춘과 그의 약혼자, 절세미인 만염낭, 도적 형제 등이 연애와 결혼을 두고 벌이는 사건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래된 영화에서 느껴지는 허술함과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유머도 있지만 주인공 영춘 역을 맡은 배우 양자경의 액션은 훌륭하다. 가벼우면서도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면 ‘역시 양자경!’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인공 영춘은 권법의 창시자답게 진취적이고 매력적이다. 두부 장수라고 하니 오해할 법도 한데 그는 소상공인이 아니라 거상이다. 전략가인 고모와 함께 사업을 일으켜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았다. 동시에 무예도 뛰어나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이기도 하다.
자신과 가족, 재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사는데도 주변에 남자가 끊이지 않는다. 가까이에는 결혼하지 않는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있고 그의 재산을 욕심내며 결혼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속물, 그리고 재산을 빼앗고 마을을 점령하려는 도적들이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러닝타임 내내 영춘에게 찾아와 결투하자고 조르거나 결혼하자고 조른다.
그런 영춘에게 영춘권은 단순한 무예가 아니라 생존 수단이다. 영춘권은 여성이 직접 자기방어를 목적으로 창안해 전파한 무술답게 자기방어에 특화됐다. 거리를 벌릴 수 없거나 발놀림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기술 위주로 수련한다. 힘보다 지렛대 원리와 몸의 구조를 활용해 나보다 큰 상대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고 이때 방어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반응 속도를 높이는 훈련도 함께 이뤄진다. 여성 대상 폭력이 엘리베이터, 차 안, 방과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주로 일어나는 것을 고려하면 영춘권의 핵심 기술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영화 ‘영춘권’ 에서 엄영춘은 다양한 손기술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영화 ‘영춘권’ 화면 갈무리
영춘권의 또 다른 특징은 이소룡의 스승인 엽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엽문’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제 사부는 영춘권은 7할은 손을, 다리는 3할만 사용하고 상대의 하체에 중점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손기술이 영춘권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치사우’(츠서우)는 손을 빠르고 강하게 단련하기 위한 훈련법으로 두 명의 수련자가 서로의 팔과 접촉하면서 민감성, 반사신경, 반응 속도를 키우는데, 상대와 싸우기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방의 에너지와 의도를 느끼고 반응하는 데 주력한다. 직선으로 빠르게, 수직으로 찌르듯이 내리꽂는 방식의 ‘펀치’도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연쇄 펀치는 속도감을 가진 채 상대의 중앙으로 바로 전달되기 때문에 방어하기 어렵다. 영화 ‘영춘권’에서 영춘은 ‘목인장’이라 불리는 나무로 만들어진 연습 더미를 이용해 이런 다양한 손기술을 연습한다. 영춘을 이겨보겠다고 찾아온 남성을 영춘이 제압하는 시퀀스에서 도 영춘권 특유의 손기술이 등장한다 . 영춘은 대결 장소에 두부를 펼쳐놓고 ‘ 이 두부를 으깨면 당신이 이긴 것 ’ 이라고 규칙을 정한다 . 그러고는 현란한 기술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컨트롤하는 , 멋진 액션을 선보인다 .
강하고 거칠 것 없는 영춘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도적의 두목에게 패하는 굴욕을 겪는다. 이때 마을 남자들은 영춘이 도적에게 패했다고 기뻐한다. 영화는 남자들의 덜떨어짐과(영화에서 남성으로서는 유일한 영춘의 조력자인 약혼자마저 약혼한 여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영춘에게 의존하면서도 내심 그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이중성에 웃음 포인트를 두는데, 그 이중성이 놀랍고도 현실적이다.
영춘은 두목과의 재대결을 앞두고 스승을 찾아간다 . 영춘의 스승은 여성 무술가이자 승려인 오매사태가 모델이다 . 오매사태는 역사적으로 실존 여부가 명확하지 않지만 소림사의 일원으로 무술이 매우 뛰어났고 권법을 창안해서 영춘에게 전수했다는 설이 있다 . 영춘권의 창시자도, 창시자의 스승도 여성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설정이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영춘의 스승은 영화에서 영춘에게 깨달음을 준 뒤 돌아서는 그의 등에다 대고 ‘ 남편을 찾아 결혼하라 ’ 는 조언을 던진다 . 중요한 결투를 앞둔 남자 주인공에게 그의 스승이 ‘ 아내를 찾아서 결혼하라 ’ 고 조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 이 황당한 가르침에서 영화가 여성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힘을 ‘결혼 제도’ 안에 가두는 한계 가 2025년의 ‘관객’을 안타깝게 한다.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클리셰도 어김없이 있다. 감독은 극의 재미를 위해 철저히 남성 시선으로 여성 경쟁자를 만들었다. 만염낭은 영춘과 정반대로 생존을 위해 섹슈얼한 매력을 이용한다. 영춘의 약혼자조차 그를 영춘으로 오해하면서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영춘이 흔들린다. 다행히 영춘의 고모가 ‘만염낭은 너의 적’이라고 했을 때 영춘은 ‘그는 적이 아니라 친구’라고 답함으로써 여성 간의 굳건한 의리가 지켜졌다.
남자인 척 가장하고 경계를 단단히 세운 채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 영춘에게서 오늘날의 영페미니스트가 겹쳐 보인다. 최상의 성과를 내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그들에게도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내고 ‘결혼하라’ ‘엄마가 되라’는 강요는 여전하다. 현대의 여성도 고대 중국과 마찬가지로 공적·사적 영역 모두에서 완벽해지라는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춘권’은 여성 무술가를 내세우고도 결혼 치중 서사와 여성혐오적 유머 코드로 인해 한계에 갇힌 영화다. 영춘권 최고 고수 남성 무술인인 엽문의 실제 삶을 따라가는 영화 ‘엽문’처럼 엄영춘의 무술 철학을 진지하게 다루는 2025년의 ‘영춘권’을 기다린다.
양민영 주짓테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액션 읽는 여자: 여성 주연 영화를 보며 여성의 시선으로 ‘싸우는 몸’을 발견하는 시간. 여성의 몸을 향한 협소한 시선을 확장하는 칼럼. 4주마다 연재.
자기방어 기술 - 손목 풀기
성폭력은 타깃 설정, 고립, 지치게 하기, 성폭력의 단계로 이뤄진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손을 잡아 끌고 가는 행위는 고립을 의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드라마와 영화에서 남성 주인공이 여성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을 로맨틱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단언하는데 손목을 잡는 건 성폭력의 시작이다. 즉각 손목을 풀고 멀어지는 방식의 대응이 필요하다. 자기방어에서 손목 푸는 방식은 네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손목이 잡혀 끌려가는 반대 방향으로 버티기→ 몸의 중심을 낮추고 손목을 잡은 사람 쪽으로 거리를 좁혀 다가가기→ 몸의 중심을 앞발 쪽으로 옮기면서 내 팔꿈치를 상대방 팔꿈치에 닿게 하기→ 열린 방향으로 손목 돌려 빼내기. 자세한 내용은 영상 참조.
(영상 주소 :https://youtube.com/shorts/N7VlzAuAKxU?si=q4_En90xi5h0Bt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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