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밭에 묘목을 심었다. 3년 재배한 왕매실 2주, 접목 1년차 청매실 2주, 왕벚나무 2주, 신령호두나무 2주, 무장 밤나무 2주, 옥광 밤나무 2주. 두 달쯤 지나 돌아보니 신기하게도 수종마다 둘 중 하나씩 살아남아 나뭇잎을 피웠다. 성공률 50%, 괜찮네.
농사지은 지 5년째. 처음 2년은 감자를 심었고, 3년차부터 올해까지 3년 내리 옥수수를 800평쯤 심었다. 왜 옥수수냐면 관리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힘든 일 재미난 일도 많았고 결실의 기쁨도 있었지만, 왠지 이제 재미없다. 작년까진 봄여름엔 거의 매주 갔는데 올해는 격주로, 그것도 부부가 따로 한 번씩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한 달 만에 밭에 가기도 한다. 그래도 옥수수는 잘 크고 밭은 잘 있다. 요즘은 금요일 저녁에 밭에 가서 이것저것 손볼 것 보고 토요일 차 밀리기 전에 후딱 돌아오고 있다. 밭에 머무는 시간이 24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생업이 바쁜 이유도 있지만 마음이 시들한 것이다. 직장도 연애도 정권도 3년이면 지겨워지는 게 인지상정인가.
이쯤 되니 왜 농사짓는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봤다. 5년 전, 모종의 사정으로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이 비탈밭 명의를 가족에게서 이전받았다. 세금도 허리가 휘도록 냈다. 밭을 놀리면 벌금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저것 심었다. 심으면 뭐가 나오기에 심는 면적을 늘렸다. 농사지을 때 필요한 각종 도구와 기계를 샀다. 오며 가며 쉴 곳이 필요해 농막을 들여놓았다. 쉬고 놀자니 없으면 아쉬운 물건들이 생겨 조금씩 사다보니 창고에 뭐가 가득 들어찼다. 나름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1인으로서, 쌓여가는 물건을 보니 한숨이 난다.
이 모든 과정이 상황에 따른 대응이었다. 가려우니까 긁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문득 이걸 내가 정말 원했나 싶은 거다. 재배 면적이 커지면 심고 가꾸기도 힘들지만 거둔 뒤가 더 문제다. 팔기엔 애매하고 먹기엔 너무 많다. 나눠주는 데도 힘이 든다. 의사를 묻고 포장하고 택배를 부치고 멀지 않은 곳은 차로 돌며 배달하느라 시간도 돈도 마음도 많이 써야 한다. 한 가지 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건 우리 같은 농부에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좀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나무를 심어보기로 했다. 봄에 이것저것 유실수를 심어본 이유다. 이제는 강원도가 주산지가 된 사과를 심을까, 기후위기로 강원도에서 매실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 번 심으면 200년은 산다는 호두를 해볼까. 우리 밭은 산에서 내려와 땅으로 스민 물이 나갈 곳이 없어 비만 오면 질퍽질퍽해진다. 배수가 안 되는 땅에선 나무가 살기 어렵다. 그래서 올가을 유공관을 심고 마을 우수로까지 관을 연결하는 대대적인 배수 공사를 하기로 했다. 관이 지나가는 이웃 땅의 주인과도 이야기를 마쳤다.
내년엔 봄부터 가을까지 철마다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여러 나무를 심어야지. 예쁜 꽃도 포기할 수 없으니 이른 봄 피는 매화, 산수유, 목련부터 개나리, 벚꽃, 라일락까지. 한여름에 청량하게 피는 자귀나무도 포기할 수 없지.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마음 끌리는 대로 한 그루 한 그루 알맞은 곳에 심고 정성 들여 가꿔 아름다운 나무 정원을 만들 생각이다.
골치 아프면 그 땅 팔아버리라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다. 골치가 안 아프면 사는 게 심심해진다. 농사가 재미없으면 재미있는 농사로 바꾸면 된다. 이 땅에서 지지고 볶는 걸 자잘한 재미로 삼고 인생의 권태를 넘어갈 테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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