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에 저항하는 절박한 외침참척(慘慽)의 고통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외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보냈다. 이어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큰아들을 잃었다. 스무 살 남짓에 이 세상을 떠난 외삼촌에 관해 물어도 어머니는 별말이 없었다. 외할머니는 식당을 하며 매일 단골손님들과 약주를 했다. 해방 ...2024-11-09 21:21
길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전역하고 복학했는데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니 새내기나 다름없었죠. 그때 저는 몹시 외로웠어요.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거든요. 강의실 뒤편에 앉아 말없이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갔어요. 그러다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된 거예요. 제가 선생님께 시를 쓰고 있다고 했...2024-10-19 22:32
지지 않는 꽃 없고, 피지 않는 꽃 없다몇 년 전 한 대학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특강 제목은 ‘앞으로 잘할 것’. 강의실 단상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입 가까이에 댔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후회했다. 주제넘은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문학에 대해 말할수록 그것은 내...2024-09-01 15:33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퍼펙트데이즈에 나온 노래 듣고사야카는 문어 모양 미끄럼틀이 있는 작은 공원을 타코 코엔이라고 불렀다. 색 바랜 문어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망루 같은 전망대에 올라 해넘이를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갑작스레 떠난 여행이었다. 올해 초 장편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시...2024-08-10 21:58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노래는 시작된다오전에 일이 없으면 러닝머신 위를 걷는다. 프리랜서로 일하다보면 일과가 불규칙해 몸이 망가지기 일쑤다. 나는 게다가 작업 속도가 느린 편이라 새벽까지 원고를 붙잡고 있을 때가 많다. 평소에 꾸준히 체력을 관리해야 오래 쓸 수 있다고 하는 선배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2024-07-20 22:39
내가 쓸모없다고 해도 멈추지 않는 이유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었다. 10층까지 걸어가야 했다. 반절쯤 올라갔을 때였나, 어느 집 앞에 빈 페트병과 알루미늄 캔 더미 사이에 그림 한 폭이 버려져 있었다. 액자 한쪽이 망가진 상태였다. 누가 볼세라 그것을 들고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베트남에 있는 후에 왕궁(H...2024-06-22 17:42
당신이 건넜을 고비, 내가 건너야 할 고비첫 책을 내기 전 서울 동교동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선배 시인이 먼저 들어가 편집 일을 하고 있었다. 선배와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떨던 시간을 떠올리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둘 다 그 회사에 오래 다니진 못했지만 그 시절은 내게 특별...2024-05-13 09:31
우리 앞에 와 있는 오래된 슬픔을 곱씹는다네가 약을 삼키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우리 부부는 기복이 있는 편이다. 한쪽이 가라앉으면 다른 한쪽이 버팀목이 돼 끄집어낸다. 생애에 리듬이 있다면 서로 엇박자인 셈이다. 나는 낙관적이면서 비관적이다. 글 쓰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면서도 글쓰기를 할 때마다 매번 난항...2024-04-20 20:34
기억하려는 것은 새 기억으로 다시 온다개를 키우고 싶다고 떼쓰다 드러누운 소년은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몸과 마음이 아팠다. 가을날이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고열에 시달렸다. 저녁때였나. 소년의 아버지가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작고 귀여운 생명이 꼬리를 흔들...2024-03-30 22:33
산 자는 죽은 자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살레 알란티시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나고 자랐다. 2년 전인 스물다섯 살 때 한국에 왔다. 나는 그를 지인 소개로 알게 됐다. 화면으로 처음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차 안이었다. 한 일간지에 난민 이야기를 실으려 한다고, 네가 겪은 일을 편한 방식으로 ...2024-03-09 21:13
우리는 짐작보다 더 빨리 지나갈 거야어린 나는 엄마 손잡고 커피숍에 따라갔다.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던 기억. 그 남자 얼굴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멍든 눈을 가리려고 진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사표를 내고 이십여 년을 집안일에 전념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상사를 만나러 간 사연과 마음이 어떠했는지 ...2024-02-17 21:47
도망치지 않겠다고…잔나비 ‘전설’신정을 맞아 식구들과 구룡사에 가서 소원을 빌었다. 눈 내린 산길을 걸으며 지난 1년을 돌이켰다. 시간이란 그저 인간의 개념이지만 새해에는 괜스레 싱숭생숭하다.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이 먼저 떠오른다. 작년이 아주 오래전 같다. 잊힌 시간이 몸 깊이 박혀 있다가 불현듯...2024-01-14 16:35
계속되는 파도가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끌었다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의 2000년 작 는 주모운 역을 맡은 양조위(량차오웨이)가 매미 울음으로 들끓는 앙코르와트, 어느 구멍 난 벽에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봉한 뒤 폐허가 된 사원을 빠져나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 장면을 흉내 내어 나무 구멍에 입을 대고 사랑을 ...2023-12-23 17:44
책방의 밤, 소리 내어 함께 읽기 “다르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일주일에 한 번 마을에 있는 책방에 나가 일한다. 이사하고 얼마 뒤 어떤 일로 책방 문을 두드렸다. 그 인연으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소리 내어 시를 읽는다. 한 편의 시를 한목소리로 또박또박 읽는다. ‘하나둘’ 하는 신호에 다 같이 시를 읽는 경험은 특별하다. 모두 같...2023-12-02 20:59
우리는 질문을 멈춰선 안 된다세계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무력 충돌은 또 다른 전쟁으로 번졌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불과 3주 만에 어린이 3천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23-11-12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