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원'.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 홋스퍼와 루턴타운의 2023~2024시즌 프리미어리그 8라운드 경기를 보기 위해 구매대행사에 문의해 받은 입장권 가격이다. 이번에 승격한 루턴타운의 홈구장이 워낙 작아 표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도 했다. 그나마 세 곳 구매대행사 가운데 표를 구할 수 있다는 한 곳이 부른 금액이다. 프리미어리그 직관은 ‘버킷리스트’였다. 손흥민까지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만, 한 경기에 200만원을 쓸 정도는 아니다. 다른 팀으로 눈을 돌렸다. 이럴 수가, 이런 ‘빅매치’가 열린다니. 아스널과 맨체스터 시티. 강력한 우승 후보들 경기가 마침 영국 런던에서 예정돼 있었다. 아스널은 프리미어리그 13회 우승, FA컵 최다 우승을 경험한 전통 강호다. 맨체스터 시티는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이어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하며 현존 최고 클럽으로 거듭났다. 두 팀은 올 시즌에서도 3위 안에 올라 있었다. ‘꿩 대신 닭’인지, ‘닭 대신 꿩’인지 모를 경기를 볼 기회였다.
시즌권을 구매하지 않은 이들이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직관하려면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공식 누리집을 통한 구매다. 이 경우 가장 저렴하고 안전하게 표를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프리미어리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팬이 많은 리그인 만큼 인기 구단의 경우 온라인 예매 경쟁이 치열하다. 또 대부분의 프리미어리그 팀은 표 예매를 하기 전 구단 누리집에서 멤버십 가입을 하도록 해놨는데, 이 비용만 10만원 정도다.
두 번째는 현장에서 구매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는 대부분 경기가 매진되기 때문에 현장분도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매진되지 않거나 취소표가 발생하는 경우 현장에서 살 수 있지만, ‘복불복’이다. 물론 경기장 앞엔 암표상도 많지만, 암표는 논외로 한다. 마지막 방법은 구매대행사를 통한 구입이다. 특히 국내에선 손흥민의 활약 이후 직관 수요가 늘어나면서 구매대행업체가 많이 생겼다. 구단에서 파는 공식 가격보다 웃돈을 얹어줘야 하지만 복잡한 과정을 모두 건너뛸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구매대행사는 63만원이 가장 싼 좌석이라고 안내했다. 구단마다 푯값은 다르지만, 공식 누리집에서 일반석 입장권을 사려면 멤버십 가입을 포함해 평균 30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구매대행사를 거치면 더 비싸지고, 인기 구단 경기나 ‘빅매치’는 더 올라간다. 게다가 아스널은 프리미어리그 구단 중에서도 푯값이 가장 비싸다. 앞서 200만원을 들은 탓일까. 제일 좋은 자리를 덜컥 샀다. 100만원.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축구 한 경기를 보려고 순식간에 통장에서 100만원이 빠져나갔다.
아스널 경기는 2023년 10월8일(현지시각) 일요일 오후 4시30분에 열렸다. 경기 시작 4시간 전, 숙소를 나섰다. 홀본역에서 피커딜리선으로 갈아타고 나니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아스널’역. 역에 도착하자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대거 내렸다. 경기장까지 거리가 제법 됐지만 지도 앱을 켤 필요도 없었다. 무작정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갔다. 경기 시작까지 3시간 넘게 남았는데도 경기장까지 가는 거리는 축제였다. 거리 곳곳에서 음식과 맥주를 팔았고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아스널 유니폼이 보였다.
오후 1시30분, 경기 3시간 전 아스널의 홈구장 에미리츠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경기장 앞엔 일찍 도착해 입장을 기다리는 팬으로 가득했다. 유니폼 가게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보니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유니폼을 포기하고 맨 뒤에 서서 경기장 안에 들어갔을 때가 오후 2시께였다. 홀린 듯 곧바로 관중석으로 향했다. 윤기 나는 푸른 잔디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6만여 명이 들어설 수 있는 관중석에 압도됐다. 영국 축구장은 한국과 달리 운동장과 관중석이 유난히 가깝게 붙어 있어 더 몰입됐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관중석에 아무도 없었다. 분명 길게 늘어선 줄 가장 뒤에서 입장한 터였다. 다 어디로 갔지?
아스널 에미리츠 스타디움 2층엔 펍과 라운지, 레스토랑이 있다. 이곳에 거의 모든 관중이 모여 있었다. 앉을 자리 없이 서서 음식과 술을 즐기는 팬도 많았다. 구매대행사로부터 라운지에서 음식이 제공된다고 들었던 터라 자리를 잡고 서둘러 카운터에서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를 받아 들고 떠나려 하자 직원이 손을 뻗었다. “7파운드입니다.” 공짜가 아니냐고 물으니 무슨 말이냐며 옆의 직원에게 묻는다. 그 직원도 고개를 갸웃거리자 매니저를 불러오겠다고 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매니저는 라운지나 펍에서 제공되는 음식과 음료는 무료가 아니라고 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 때만 병맥주가 무료란다.(그마저도 전반전 종료 1분도 지나지 않아 동이 났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조용히 구석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다. 라운지와 펍 곳곳에선 프리미어리그 다른 구단들의 경기가 중계됐다. 먹고 마시며 떠드는 팬들 사이에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다른 팀들의 경기를 보다보니 금세 경기 시간이었다.
관중석 안에 주류를 반입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경기장을 찾은 이들은 열심히 먹고 마셨다. 경기 시작 30분 전,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올 때까지도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다. 물밀듯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경기 시작 10분 전쯤이었다. 마침 전광판에 이런 알림이 올라왔다. “팬들의 지지와 응원을 존중하지만, 모두가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서 있지 못하는 팬들을 위해 앉아주세요.” 얼마나 서서 응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경기 시작 전에 이런 공지가 나올까. 그 이유를 알기까진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킥오프 직전 경기장 한쪽 구석에서 노래가 울려퍼졌다. 원정팀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원정팬을 위한 좌석을 구분한다. 라이벌 구단 간 경기에는 경찰이 대거 동원되기도 한다. 이날 맨체스터 시티 팬들에게 허용된 좌석은 1층 구석. 전체 좌석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금세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5초도 안 돼 아스널 팬들이 질세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유명한 아스널 응원가 ‘The Angel (North London Forever)’이었다.
“North London forever(북런던이여 영원하라) Whatever the weather, these streets are our own(날씨가 어떻든, 이 거리는 우리의 것이다) And my heart will leave you, never(그리고 내 마음은 결코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 My blood will forever run through the stone(내 피가 영원히 돌을 뚫고 흐를 테니)” 짧은 네 소절을 부르는 동안 아스널 팬들은 한마음이 됐다. 선수들은 경기장 가운데 모여 전의를 다졌다. 경기 시작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윽고 휘슬이 울렸다.
경기는 득점 없이 팽팽한 흐름이 이어졌다. 홈팀 아스널은 주전 공격수인 부카요 사카가 빠지면서 날카로운 공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맨체스터 시티는 전반 내내 아스널을 밀어붙였지만 한 방이 없었다. 세계 최고 공격수 엘링 홀란은 아스널 수비에 발이 묶여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흔히 스포츠 팬을 12번째 선수라고 비유한다. 운동장에서 나란히 뛰진 못하지만, 열정적인 응원으로 기여한다는 의미다. 이날 아스널 팬들은 가장 영향력이 큰 12번째 선수였다.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쉬지 않고 응원하고 야유를 보냈다. ‘F’로 시작되는 욕설은 전반전에만 수백 번이 나왔다.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응원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티브이 속에서 함성으로 뭉뚱그려지는 관중 소리엔 경기에 영향을 미치려는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야유와 욕설은 꼭 원정팀 선수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실수하거나 좋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아스널 선수들에게도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티브이로 봤다면 다소 지루할 수 있었던 경기가 매 순간 긴장으로 가득 찼다.
경기 내내 밀리던 아스널은 정규시간 4분을 남기고 극적인 결승골을 넣었다. 공이 골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팬이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경기장이 흔들린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종료 휘슬을 애타게 기다렸다. 마지막 휘슬이 울리자 주변 모든 팬이 손을 번쩍 치켜올리고 뛰며 노래를 불렀다. 응원가가 다시 돌았다. 승리를 다짐하던 노래가 승리의 노래가 됐다. 마치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희열이 곳곳에서 뿜어져나왔다.
경기장을 나오는 내내 아스널 팬들은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불렀다. 팬들에 휩싸여 홀러웨이로드역까지 왔다. 도착하니 입구에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걸어가는 팬에게 물었더니 경기 직후엔 자주 닫는다고 했다. 경기장에 올 때처럼 그들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한 15분 정도 걸었을까, 다음 역에 다다랐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는데 노래가 들렸다. 지하철을 가득 메운 팬들은 열차 천장을 두들기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만차인데다 팬들이 계속 열차를 두들기며 노래하는 탓에 한동안 출발을 못했다. 10분 넘게 정차하는데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열차에 있는 시민들도, 승강장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시민들도 미소만 짓고 있었다.
런던(영국)=글·사진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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