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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현관으로 지옥 안내문이 날아왔다

서른 즈음에 맞이한 사기 피해 경험 에세이로 기록한 <전세지옥>
등록 2023-10-26 19:49 수정 2023-11-01 08:39

삶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면접 날, 합격 시그널을 받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으로 면접장을 나섰다. 양손에 중국 음식과 고량주를 들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 기분의 유효기간이 끝났다. 현관문엔 ‘안내문’이라고 적힌 낯선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귀하가 사용(점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경매가 신청되어….” 불행에서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기다리는 건 새로운 지옥으로 이끄는 안내문이었다.

2022년을 전후로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처럼 퍼졌다. 사기가 빌라에 집중된 탓에 취약계층에 피해가 몰렸다. 특히 젊은 피해자가 많았다. 우리가 피해자에 관해 아는 건 이 정도 수준이었다. 보통 한 사건에 수백 채의 빌라가 걸려 있던 탓에 피해자 이야기는 사회초년생, 신혼부부가 많다는 정도로 뭉뚱그려졌다. 그 안에는 이들이 왜 사기를 당했는지, 전세제도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사기를 당하고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회복이 어려운지 등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됐다.

<전세지옥>(세종 펴냄)은 전세사기 피해자들 외엔 굳이 알려 하지 않았던 투쟁의 기록이다. 1991년생 최지수, “사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청년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전 재산을 잃는다. 지은이는 수많은 전세사기 피해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살아가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바퀴벌레가 들끓고 녹물이 나오는 회사 기숙사를 견디다 못해 빌라를 구했고, 공인중개사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정말 좋지 않은 매물은 피했다. 그럼에도 2020년의 부동산 시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세가 동났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지은이는 여러 차례 고백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평범’하지 않은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경매 안내문을 발견한 이후의 과정은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큰 문제가 아니라는 부동산중개 사장의 말을 믿고, 일말의 희망을 가져본다. 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인다. 피해를 복구하려는 과정은 마치 영화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서서히 올라가는 서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사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820일 동안의 여정엔 드라마처럼 난관을 극복하는 이야기도, 영화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도 없다. 전세사기에서 파생된 시련이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이 책의 결말은 없다. 지은이의 진짜 결말이 궁금해진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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