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경기도 안산에서 이주노동자들과 축구 경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 몇 명과 꼽사리를 꼈다. 형은 실력이 시원찮은 나를 살뜰히 챙겨줬다.
나는 뛰는 시간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운동장 한편에 한 여자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며 혼자 놀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는 이주노동자의 딸아이였다. 스탠드에서 빠져나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 아이와 놀았다. 환하게 웃는 아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래된 수동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한때 사진관을 하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라고 했다. 덩달아 나도 필름 카메라를 한 대 샀다. 그 계기로 사진에 푹 빠져 어디를 가든 사진기를 챙겼다.
그날 찍은 사진 중에는 형과 찍은 것도 있다. 바닥에 카메라를 두고 타이머를 맞춰 찍었다.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형과 나는 쪼그려 앉아 브이를 그리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종종 그 팀에 가서 축구를 했지만 나는 그 뒤로 발길을 끊었다.
서울 홍익대 근처의 작은 공연장에서 우연히 형을 오륙 년 만에 다시 만났다. 형은 무대에서 랩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형의 두 번째 모습이다. 그 공연 전후로 모 시인의 낭독 공연이 있었다. 키가 큰 시인이 방독면을 쓰고 시를 암송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뒤풀이 자리에서 형에게 말을 붙였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형은 동료들과 시를 매개로 한 공연을 기획했다. 우리가 같이 일하게 된 뒤에도 형은 나를 존대했다.
그리고 열두 번의 여름을 보냈다.
트루베르는 2007년 결성된 “시(詩)를 노래로 부르는 팀”이다. 2017년 발매한 첫 정규앨범 《목소리 숨소리》는 박두진, 백석, 김성규, 유병록, 이근화 등 여러 시인의 시편을 음악의 몸을 빌려 재창작해 한국 시의 어제와 오늘을 충실히 소개한다.
형은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시를 썼고 몇몇 군데에 응모해 최종심에 올랐다. 우리는 연말이면 사람들과 모여 새해 카운트다운을 했다. 얼싸안고 건강하자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병원에서였다. 팬데믹으로 면회가 금지된 때였지만 그때만큼은 병원에서도 허락했다. 한 명씩 병실에 들어갔다. 내 차례가 왔다. 형은 침대에 누워 마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했다.
형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디디면서 걷다가 거리에 주저앉아서 한참 동안 숨을 고르기도 했습니다. 과분한 하루하루가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왔다가 무심하게 걸어갔습니다.”
삶이 구겨질 때면 나는 형이 남긴 음악을 듣는다. “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도봉>) 한심하고 부끄러운 여름을 보냈다. 누굴 탓할 것도 없이 무력함과 절망에 사로잡혀 눈앞의 것을 외면했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만으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시인 백석은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하고 노래했다. 트루베르 멤버 피티컬(PTycal)은 이 구절을 동명의 곡 끝부분에서 반복해 부른다.
세상은 결코 버릴 수 없다는 듯이.
최지인 시인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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