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 장르, 통칭 ‘로판’이란 장르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할 것이다. 특히 웹툰을 한번쯤 챙겨본 경험이 있다면 이 장르를 모를 수 없다. 그리고 로판을 말할 때는 미묘한 뉘앙스가 존재한다. 로판 장르는 워낙 비슷한 내용의 웹툰이 많아 보통 ‘로판을 좋아한다’고 하면 ‘아, 주인공이 회빙환(회귀·빙의·환생)해서 복수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라고 대충 정리된다. 그리고 로판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반응에 자존심 상하면서도 이를 수긍하기 때문에 보통 수줍게 로판‘도’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랬다.
아무튼, 나는 로판‘도’ 본다.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는 ‘까마귀’라서 로판 특유의 화려하고 반짝이는 그림체를 좋아한다. 사실 양산형 내용도 상관없다. 지겨울 때도 있지만, 클리셰가 흥행이 보증된 이유가 있는 법. 작가가 의도한 ‘설렘 포인트’에서 들뜨고 웃고 야단법석을 떠는 흔한 로판 독자다. 그중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웹툰을 소개하려 한다. 웹툰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다>는 황도톨 작가가 쓴 동명의 웹소설이 원작이다. 정서 작가가 각색과 그림을 맡았다.
주인공 ‘피오니에’는 한국인이 로판 소설 속에 빙의한 존재다. 빙의된 시점은 소설이 완결된 뒤다. 피오니에는 소설의 주 무대이던 ‘페어슈프렌 제국’의 옆 ‘가르텐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인이던 시절 자신의 소설 속 ‘최애’(가장 애정하는 캐릭터)인 ‘서브남’(조연 남자주인공) ‘리히트’가 반란을 일으키고 제압된 뒤 ‘슈테른’이라는 추운 지방의 영주로 추방됐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
특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던 장면이 있다. 피오니에와 리히트가 페어슈프렌 황궁에 들었을 때, 두 주인공은 각자의 방에 가기 위해 복도에서 헤어진다. 헤어지기 직전, 피오니에는 “잠깐 귀 좀…” 하며 리히트를 자신의 눈높이로 끌어내려 기습적으로 그의 볼에 입을 맞춘다. 이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리히트는 얼굴을 붉히며 주먹으로 거울을 깬다(!). ‘그냥… 결혼…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처음 피오니에가 슈테른에 왔을 땐 차갑고 무뚝뚝하게 굴던 사람이 설렌다고 거울을 부수다니 정말 과격한 변화다. 침대를 팡팡 내려치며 봤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 후반부에서 피오니에는 빙의되기 전 ‘진짜 피오니에’의 영혼에게 부름을 받는다. 진짜 피오니에는 빙의된 피오니에에게 자신이 원했던 삶은 가르텐 왕국에서 아버지와 오빠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빙의된 피오니에가 앞으로 리히트와의 사랑 때문에 가르텐을 떠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면 다른 영혼에게 몸을 주겠다고 경고한다.
빙의된 삶을 생각했다. 내 몸에 다른 사람이 빙의돼 자기 멋대로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까, 아니면 낯선 몸에서 깨어나 삶을 운영하는 게 더 어려울까? 쉬이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할 때 ‘저거 내 몸으로 하루만 살아보면 이런 말 안 할 텐데…’ 싶을 때도 있지만, 아픈 몸의 육체적 한계를 실감할 때 ‘단 하루만이라도 다른 몸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욕망에서 ‘빙의’라는 아이디어가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빙의된 피오니에에게 육신을 넘겨준 이상, 그가 자기 욕망대로 움직일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말인즉슨, 누군가의 몸에 빙의하고 싶다거나, 누군가가 내 몸에 빙의하길 바라는 일이 참 덧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그것이 온전한 내 인생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상상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상상에서 나온 작품 중 재밌는 것이 많다.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웹툰 소사이어티: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스무 살의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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