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덕후’지만 공포드라마는 거른다. 어릴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던 <전설의 고향> 시리즈나 아직도 배우 심은하의 초록빛 눈과 변조된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 <엠>(M) 등 여름이면 ‘납량특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찾아오는 공포드라마 보는 게 내게는 극기 훈련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큰 결심을 하고 귀신이나 악령이 나오는 공포드라마나 오컬트물을 보다보면 이런 질문이 생기곤 했다. 왜 저 귀신들은 모두 슬프고 억울할까? 그들은 왜 온전히 죽지도 못한 채 자꾸 나타날까?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악귀>에 나오는 귀신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악귀>에는 다양한 귀신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태자귀는 굶어 죽은 아이의 혼령이다. 과거에는 신력이 떨어진 무당이 남의 집 어린아이를 유인해 가둬놓고 굶기다가 대나무통에 음식을 담아 꾀어내어 칼로 찔러 죽인 뒤 그 혼을 가둬 마을 사람들을 미혹해 자기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염매’라고 하는데, <악귀>에는 1958년 장진리라는 마을의 무당 최만월(오연아)이 이목단(박소이)을 그런 방식으로 살해한 것으로 나온다. 만월이 자기 이익을 위해 염매 행위를 한 것인지,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주민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목단을 희생양 삼은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으나, 구산영(김태리)의 몸에 깃든 귀신은 그 태자귀인 것으로 추정된다. 태자귀 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혼령인 자살귀, 집을 떠나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인 객귀, 생전에 탐욕에 지배당하던 사람의 혼령인 아귀 등이 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비록 각양각색의 귀신이 나오지만, 귀신은 거들 뿐 <악귀>는 사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이야기다. 태자귀는 각종 아르바이트와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고시생 산영의 분노나 은근한 욕망 등을 자극하며 힘을 키운다. 인간의 약한 면을 이용하기는 아귀도 마찬가지다. 산영의 동창 윤정(이지원)에게 씐 아귀는 욕망에 눈이 시뻘게져 명품 가방을 가진 유튜버를 살해한다. 산영과 함께 악귀를 추적하는 민속학과 교수 염해상(오정세) 집에 사는 귀신 김우진(김신비)도 아귀다. 다른 귀신은 살아 있을 때의 문제가 해결되면 소멸하지만 아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의 욕망이 강하고 질기다는 뜻이다.
귀신은 인간의 ‘약한 부분’을 반영하지만,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현우(김정철)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방에 갇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귀신이 되어 집 주변을 배회한다. 광천시에 있는 어느 고시원에는 청년 셋이 연쇄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들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악덕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갚지 못해 협박당하다 자살한 대학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장진리에 있던 덕달이 나무에는 이 억울하게 죽은 청년들이 자살귀가 되어 매달려 있다.
노인들만 사는 백차골 마을에는 객귀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박씨 할머니 앞에 나타난 객귀는 시골 마을이 싫다며 가출했다가 자살한 그의 딸이다. 박씨 할머니는 몇십 년 만에 귀신이 되어 돌아온 딸과 함께 있기 위해 객귀를 막는 허재비(허수아비) 인형을 태워버리고 장승을 이용해 귀신 길을 낸다. 그 결과 그 마을에 객귀가 창궐한다. <악귀>에 등장한 귀신은 저마다의 한을 품고 등장한다는 면에서 악한 면이 부각되는 악령이기보다는 <전설의 고향> 유의 ‘억울한 사연이 많은’ 귀신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사적이기보다는 사회적 면이 있다. 보이스피싱 사기, 가정폭력, 빚에 내몰린 청년, 청년 자살, 노인만 남은 지역 공동체, 돈을 향한 욕망 등 한국 사회가 끌어안은 문제를 하나씩 건드린다.
그렇다면 <악귀> 속 죽음은 왜 자살이어야 했을까? “자살 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위협과 핍박을 받다가 그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는 해상의 말처럼 드라마 속 인물은 모두 자기 의지대로 죽는 게 아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자살당한 것이다. 자살은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지만 전적으로 ‘스스로’ 행하는 일은 아니다. 가정폭력을 당하다 죽은 현우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채의 늪에 빠졌다가 죽은 청년들처럼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사회적 요인이 작동한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이것이 ‘악귀’가 존재하게 된 이유이자 <악귀>를 관통하는 질문이리라.
<악귀>는 삶과 죽음이 연결된 경계에서 때로는 살아 있는 이와 이미 죽은 이가 연대해서라도 진실을 파헤쳐 현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면에서, 그 ‘현재의 문제’란 결국 자본과 권력에 의해 생겨난 것임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김은희 작가의 전작들과 닮았다. 그렇기에 오컬트물이라는 외피를 썼지만, 김은희 작가가 그간 보여준 수사물에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그래서 공포드라마 못 보는 나도 수월하게 볼 수 있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어쩌면 이 한 문장을 12부로 나눠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드라마에서 인간은 돈 때문에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질투와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을 해칠 정도로 무서운 존재다. “악귀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아귀 우진의 말이 드러내듯 악귀는 결국 인간에서 비롯된 존재로서 인간의 약한 내면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킹덤>에서는 그런 인간 사회의 문제가 채워도 채워도 해결되지 않는 ‘굶주림’으로 은유됐다면, <악귀>에서는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대체됐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그런 면을 가장 잘 드러낼 존재인 악귀는 누구일까? 조심스레 예측해보자면, 산영의 몸에 깃든 태자귀는 다소 위악스럽기는 하지만 무자비해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최종 보스’로서의 악귀는 아니지 않을까? 태자귀는 산영의 분노를 반영해 보이스피싱 사기꾼을 죽이고, 가정폭력을 당한 어린아이를 구하는 데 기여하고, 청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채업자를 응징하는 등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제 능력을 사용한다. 또한 마치 신데렐라처럼 가난한 산영이 비싼 명품을 두르게 하고,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한 산영의 동창을 골탕 먹일 뿐 특별히 위협적이지 않다. 악귀이기보다 ‘츤데레’(겉은 퉁명스럽지만 속은 다정하다는 뜻)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악귀는 누구 몸을 숙주 삼아 활동할까? 6회까지 방영된 현재까지 드라마가 드러낸 문제의식을 되짚어보면, 자기 욕망을 위해 비윤리적 염매 행위를 한 만월이나, 해상의 할머니이자 중현캐피탈 대표 나병희(김혜숙)가 악귀를 만든 강력한 후보(?)로 꼽히지만, 함부로 확신하기는 힘들다. 욕망이 없는 사람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면에서 산영과 해상 모두 자유롭지 않다. 악귀에 씌지 않았더라도 가정폭력을 행사한 부모나 보이스피싱 사기꾼, 악덕 사채업자 역시 충분히 ‘악귀적’ 인간들이므로 이 드라마의 악귀가 반드시 하나일 이유도 없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지만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힘도 결국 그 무서운 사람에게서 나온다. 혼령이 죽었지만 온전히 죽지도 못한 채 인간 앞에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 “이 사건은 언제쯤 끝날까요?”라는 형사 이홍새(홍경)의 말에 “이 사람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아내야 끝이 나지”라던 서문춘(김원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왜’와 ‘어떻게’에 관한 답을 찾아야 종결된다. 그렇기에 귀신은 자기 말을 들어줄 무당이나 성직자 등 매개자, 즉 ‘영매’ 역할을 할 이들 앞에 자꾸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영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영매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힘은 없다. <전설의 고향> 속 귀신들이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권력을 가진 사또 앞에 굳이 나타나는 이유다. <악귀>에서는 귀신을 보는 산영과 해상이 그 영매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미제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 진실과 범인을 찾는 형사 문춘과 홍새도 현대판 영매로서 기능한다(서문춘의 별명이 괜히 ‘선무당’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진실을 추구했던 김은희 작가의 전작 속 인물 모두 ‘영매’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악귀>에서 가장 모순적인 존재는 산영일 것이다. 태자귀가 들린 존재이면서 누구보다 악귀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 인간. 양심과 ‘귀신 들린’ 욕망의 충돌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평범한 인간. 그 모순성이 바로 우리 얼굴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악귀는 문을 두드리며 인간을 부른다. 그 ‘문’은 귀신과 악귀를 불러들이는 허영과 욕망을 상징하지만, 문을 열어야 사건의 본질과 만날 수 있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끌어안은 ‘딜레마’다.
문만큼 중요한 게 이름인데 태자귀는 마치 자기 존재를 인간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맞혀봐”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가 ‘있었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기억해야 할 ‘이름들’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는 타인의 사정에 주목하고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줄 ‘영매’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러라고 <악귀>가 문을 열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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