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서 공부할 수 있는 건 ‘축복’… 노들 장애인야간학교 학생들이 사는 풍경
상희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고 창구에서 표를 사고 노선을 두번 갈아타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는 것도 좋았다. 다만 상희씨 언니가 가르쳐준 약국을 찾기 위해서는 때마침 길에 서 있던 선거운동원 아주머니께 길을 물어야 했다. 오후 3시 반.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김상희(22)씨 집에 도착해서야 내가 누린 그 ‘불편 없음’은 바로 ‘특권’임을 알게 되었다.
신림동에서 구의동까지 매일 6시간씩
뇌성마비 장애인인 상희씨는 방에 누워 있었다. 월드컵 축구선수들의 활발한 발동작이 TV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곧 학교 버스가 상희씨를 데리러 올 시간이다. 상희씨는 노들 장애인야간학교(교장 박경석)에 다니고 있다. 언니인 동화씨가 옷을 입혀주었다. “오늘은 예쁜 핀을 꽂아줄게, 인터뷰하니까.” 밖에서 차가 온 기척이 났다. 언니가 상희씨를 들쳐업고, 어머니가 가방을 챙겨들고, 나는 상희씨 샌들을 들고 쫓아나갔다. 최병선·한윤경 두분 선생님이 노들학교 통학차량인 봉고를 몰고 왔다. 자동차는 무척 낡았다. 뒷좌석에 제대로 된 안전벨트는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그 안전벨트는 상희씨를 바로 앉게 하는데 별 소용도 없었다. 최 선생이 상희씨의 휠체어를 뒤에 실었다. 그리고 출발. 야학수업은 6시30분에 시작한다.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상계동을 거치며 다른 학생들을 태우면서 가기 때문이다. 상희씨는 집이 멀어 제일 먼저 탄다. 그러니 학교 가는 데만 해도 3시간이 넘게 걸린다. 현재 장애인을 위한 야학은 노들학교뿐이니 다른 방법이 없다.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세요. 차가 막히면 하루 5∼6시간을 차 안에서 꼬박 있어야 하거든요. 저 같으면 못할 거예요.” 운전하는 선생님 쪽으로 고갯짓을 하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게다가 운전만 하는 거 아니거든요. 우리를 안아다 올리고, 내리고 또 휠체어도 올려야 하거든요.” 현재 야학에 오려는 장애인 학생들은 늘어나는 추세지만 통학차량이 한대뿐이라 역부족이다. 더 받을 수 없는 실정이 안타깝다. 차량 자원봉사자가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다. 상희씨가 얘기하는 동안 몸이 자꾸만 옆으로 기울어졌다. “제가 균형을 못 잡아요.” 팔걸이나 손잡이가 없으니 창문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으로 버팀대를 삼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로드 인터뷰를 하리라 작정했지만 그가 옆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부축하는 일만 해도 버거웠다. 사이사이 묻고 대답하였다. 상희씨는 애써 말을 하지만 난 번번이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자동차 소음에 목소리가 묻혀버려 자꾸만 “뭐라고요? 뭐라고 했어요?”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했다.
“자동차가 너무 오래되어서 좀 그렇지요? 차가 더 많이 튼튼한 것이면 좋겠어요.” 장애인용으로 개조한 차 한대 기증할 ‘착한 사마리아 사람’ 어디 없을까? 나한테는 왜 그 정도 돈도 없을까, 안타까웠다.
“저는요, 그래도 정말 축복받은 장애인이에요.” 상희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도 마쳤고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비장애인들은 그까짓 초등학교 그러지만요, 초등학교라도 다녔으면 하는 게 우리 장애인들의 제일 큰 소원이에요. 학교를 가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잖아요.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 그는 정말 행운이란다. “이렇게 저를 데리러 오시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고맙게 먹은 아이스크림!
차창 밖으로 한강이 지나가고 수많은 차량행렬이 그 옆을 흘러가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잘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엄마 아빠 은혜지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중학교는 일반학교를 다녔는데 일년밖에 못 다녔어요. 남들이 저보고 독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다녔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공부시간에 칠판 글씨 따라 쓰기도 힘들었고요.” 처음엔 잘 도와주던 한두명의 친구들도 너무 힘이 드니까 자연히 소원해지더란다. 그 이후 그냥 집에만 있었다. 야학을 다니기 전에는 주로 인터넷을 통해 친구들을 만났다. 야학에 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저는 암기과목을 잘해요. 국어도 재미있고 영어도 재미있어요. 하지만 수학은 못해요. 기초를 다질 수 없어서 그랬는지 어려워요.” 그는 ‘나가는 게 허락된다면’ 대학에도 가고 싶다. 즉,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된다면 말이다. 노들야학은 장애인 이동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상희씨는 처음에는 그런 운동이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야학을 그만둘까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주위에서는 내성적이고 부끄럼타던 상희가 변했다고 말들 한단다.
“공부를 해서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장애인 스스로 장애인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고 싶은 소망이 그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한다.
4시35분, 서울 시립북부장애인 복지회관 앞에 도착했다. 원래 두 학생이 타기로 되어 있었지만 한 사람은 사정상 못 나오고 또 한 사람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서 창동의 어느 아파트 앞. 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달려와 차를 빼라고 성화다. 장애인 차량 스티커를 붙여두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최 선생이 금방 가요, 금방 가요, 하면서 학생을 기다린다. 지체장애인인 윤혜정씨는 휠체어 도움은 받지 않지만 움직임이 느리다. 차에 타자마자 한 선생과 명랑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곧장 상계동. 한진구씨가 휠체어에 탄 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 선생이 안아올리고 차 뒤편에 또 휠체어를 싣는다. 한진구씨가 우리 대화에 합세했다. “상희는 논리로 따지고 들어 우리 오빠들을 그냥 안 두지요. 하하하….” 야학에 다니기 전 장애인 단체에서 일했다는 진구씨는 옛날에 비하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이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애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정작 다른 이의 도움이 절실한 시점에서는 외면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5시10분, 중계동 한 아파트에서 보행보조기구인 워커를 짚고 걸어오는 송보울씨를 태웠다. 상희씨와 같은 나이의 보울씨는 야학에 다닌 지 겨우 서너달 되었는데 벌써 몇년 된 것 같다고 한다. “야학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정다운지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들 같아요.” 봉고차 뒷자리가 사람들로 꽉 메워지니 마음이 든든해서인지 차는 흔들려도 우리는 별로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아무런 불편 없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얘기하느라 차가 멈춰 섰는지도 모르는 사이 두 선생님이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났다. “난 초코 아이스크림.” 상희씨와 혜정씨가 좋아했다. 상희씨 손에 얼른 아이스크림을 쥐어주고 나도 아이스크림에 재빨리 입을 대었다. “제 아이스크림 좀 먹여주실래요?” 상희씨가 혼자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멍청한 나는 몰랐던 것이다.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간간이 상희씨 입가도 닦아주느라 좀 바쁘긴 했지만 정말 맛있었다. 운전하기도 바쁜 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하셨을까? 세상에서 제일 고맙게 먹은 아이스크림!
언제쯤 그들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6시 좀 넘은 시각에 구의동에 있는 학교에 도착했다. 노들 야간학교는 정립회관 3층 한쪽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학우들이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맞이한다. 기다리던 선생님이 합세해 학생들을 안아내려 휠체어에 태운다. 나는 윤혜정씨와 보조를 맞춰 걸어갔다. 혜정씨는 수업이 없는 수요일에는 수화를 배운다. 전부터 공부를 했는데 조금만 더 하면 청각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장애인들 중에 제일 소외된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들은 그런 즐거움이 없잖아요.” 혜정씨는 비장애인인 나보다 느린 걸음으로 가고 있었지만 진실로 나보다 앞서가고 있었다.
중등학교반은 영어시간, 고등학교반은 국어시간이 시작되었다. 상희씨의 국어노트에는 ‘관찰자 시점’에 대해 예습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르치는 선생님과 배우는 학생들의 눈길 속에는 진지하고 밝은 기운이 담뿍 담겨 있었다. 밖에서는 서서히 여름 오후의 기운이 스러지고 있었고, 책상 앞에 앉은 학생들의 눈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턱과 계단을 없애고, 그리고 사람들의 칸막이진 마음을 터지게 하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야학에 다닌다.
노들야학을 나와 집으로 가는 행선지가 적힌 버스가 오자 나는 뛰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동전을 넣고 불편 없이 자리를 잡아 앉았다. 동대문·우이동·구파발, 그런 버스를 보며 비장애인들은 제각기 올라탈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별다른 의미 같은 것은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쯤이면 장애인들도 저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런 것쯤은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지” 하며 무심히 창 밖을 보는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체포 저지 집회 등장한 김흥국 “윤석열 지키기, 좀만 더 힘내고 뭉치자”
버티는 경호처, 윤석열 체포영장 막으면 ‘내란 수비대’ 전락
꽝꽝꽝꽝꽝...KBS 촬영팀, 세계유산 병산서원 못질 훼손
국힘 김민전 “가는 곳마다 중국인들이 탄핵 찬성…이게 본질”
우원식 “헌법재판관 세 명 임명은 여야 합의사항”…공문 공개
‘5년 이하 징역+공무원 자격 박탈’…경호처가 윤 체포 막는다면
경찰, 대통령 관저 앞 윤석열 지지자 30여명 강제 해산
‘경호처는 물러서라’…윤석열 체포영장 집행 길 튼 법원
윤석열, 헌재 답변서는 안 내고 수사기록 증거채택 저지 급급
관저 앞 윤석열 지지자 위협에도…비상행동 “내란의 밤 끝내고 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