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성백혈병 환우회’ 김상덕 간사… 글리벡과 골수이식 넘어 생명의 불꽃 피운다
그가 손바닥에 알약을 쏟아부었다. 주홍빛 캡슐 4알. “이게 초기환자 하루치예요. 10만원어칩니다.” 다시 두 알을 더했다. “이렇게 하면 만성환자 하루치. 얼마인지 아세요?” 백혈병 환자들에게는 생명의 약인 글리벡. 제약회사가 가격이 맞지 않는다고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느니 공급을 중단하겠다느니 하는 그 약, 글리벡이었다. 난 가슴 졸이며 약을 살펴보았다. 어떤 약이기에 사람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이야기되고 있단 말인가.
‘한국 만성백혈병 환우회’의 김상덕(31) 간사는 사무실로 찾아온 환자 보호자와 상담 중이었다. 충남 서산에서 온 김성환(48)씨의 열한살난 딸은 소아 백혈병에 걸려 8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이 약이 감기약도 아니고 중간에 빼면, 끊으란 얘기예요? 그러니 환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한달에 330만원 주고 먹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달려가 막 따지고 드니 무상 공급하겠다고 한 거잖아요.” 정부에서 고시한 글리벡 약 가격과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 사이의 문제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1알에 1만7862원 가격을 못박느니 자신들이 제시한 2만4050원이 관철될 때까지 차라리 무상 공급하겠다는 것이 노바티스의 작전이었다.
약값을 위해 집을 파는 사람들
백혈병을 자조적으로 ‘부자병’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은 글리벡이 치료제라고 알지만 글리벡은 현상유지를 해주는 약일 뿐이다. 약을 먹으면 먹은 만큼 살 수 있는 냉정한 약이니 어찌 말끝마다 돈 얘기가 안 나올 수 있겠느냐 말이다. “오늘 참 잘 오셨어요. 앞으로는 소식지도 받아 보셔야지요.” 두 사람은 한두 마디 만에 서로가 처한 상황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난 지금이라도 의사가 오진한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어요. 그럼 그동안 들어간 경비, 시간 그런 거 고스란히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고향에 내려가겠어요.” 김성환씨는 한때 대인기피증까지 걸렸단다. “친지들이 아이 치료는 잘 되냐 물으면 대답이 난감해요. 어쩌다 만나면 돈 얘기 하는 줄 알고….” 선량한 인상의 김씨는 결코 지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환우회’는 단순한 동병상련의 모임은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손실이 커요. 일해야 할 사람이 환자 간호하기 위해서 들어앉으면 집안은 누가 돌봅니까? 가정이 깨져요. 국가가 가정을 지키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의료혜택을 받기 위해 이혼을 하는 경우까지 있어요. 왜 이래야 하느냐고요?!” 김 간사는 목청을 높였다.
지난 6월 활동을 시작한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이 많다. 엄청난 약값 마련과 과연 수술은 가능할지, 의료보험은 어떻게 되는지….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눈앞에 닥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약값을 위해 집을 판다(자기 집이 있다면). 백만 단위는 그냥 뛰어넘고 천만 단위도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고 수술의 경우 억 단위로 가는 돈을 마련하려면 다른 수가 없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던 총각 김상덕씨도 그랬다. 맨 먼저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서 고향집 논밭을 팔았다. 그 다음은 큰형님이 집을 팔고 전세로 옮기고, 작은형이 은행대출을 받았다. “제 병이 재발한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집안 사람들 앞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 말을 하면 작은형 집 팔아서 그 돈 달라는 얘기밖에 안 되거든요. 재발하면 글리벡을 먹어야 하는데 누구보고 손을 벌릴 수 있겠어요.” 김상덕씨는 바짝 마른 입술에 물을 적시며 얘기를 이었다.
골수이식수술, 산 넘어 산
“처음 일년 동안은 어떻게 해서든지 치료해서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나, 뭘 해서 먹고사나, 치료비는 어디서 구하나 그 생각뿐입니다.” 김상덕씨는 계속 물을 마셨다. “수술하고 나면 침샘이 마르거든요. 그래서 입 속에서 침이 안 나오니 충치가 생겨요. 밥을 먹다가도 이가 빠져요.”
그는 지난해에 골수이식수술을 받았다. 하늘이 도와 누나와 골수가 맞아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숙주반응’ 때문에 그는 피부가 까맣게 타고 손바닥이 허옇게 벗겨지고 있다. 이런 모습이 되어 누나한테 괜히 미안하단다. 요즘 유난히 드라마 주인공 중에는 백혈병 환자가 많이 등장한다. 고아인 주인공이 마침내 피붙이를 만나 골수이식수술을 받고 금세 건강해진다는 얘기다.
“하… 백혈병 환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좀더 잘 알아보고 얘기를 만들면 좋겠어요. 골수이식수술을 받는다고 다 살아나는 건 아니거든요.” 골수이식수술이 완치로 가는 유일한 길이지만 확률은 반반이라고 한다. 골수이식수술을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50살이 넘으면 골수이식은 보험이 적용 안 돼요. 개인 부담으로 하면 두달 동안만 1억원이 들어요. 환자가 집안의 가장일 경우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요.”
한 중년의 가장은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1억원을 투자하고 아내와 자식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하느니 치료를 포기하겠다며 그냥 시골로 내려갔다. 자기와 맞는 골수를 찾는 일이란 하늘의 별따기지만 그전에 골수 기증자를 구하는 일부터가 멀고 먼 길이다. 몇해 전 ‘성덕 바우만’이 화제가 되면서 골수기증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적이 있었지만 모 일간지의 “기증자가 후유증을 앓는다”는 사실무근의 기사 때문에 그 관심마저 사그라진 형편이다. 골수기증자의 수를 나라별로 비교해보면 대만 15만, 일본 20만, 한국 2만명이다. 간신히 구해놓은 공여자가 중간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백혈병 환자에게 골수이식수술은 엄청난 것입니다. 공여자는 3일간 병원에 머물지만 환자는 열흘 전부터 무균실에 들어가서 원폭 투하하듯이 항암제를 맞고 기다립니다. 환자 몸 속의 골수세포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서죠. 그런데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언젠가 여덟살짜리 아이가 무균실에서 기다리다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맞지도 않은 골수를 수혈했었지요….” 김상덕씨는 목이 막혀 말을 맺지 못한다. 그는 울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눈물샘도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간사는 얘기 도중 자주 물컵과 인공 눈물약병을 들었다 놓아야 했다.
모자를 벗으니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투병하기도 힘든데 이렇게 기꺼이 환우회 일을 하시는군요. 힘들지 않으세요? “달리 할 일이 없어서지요. 허허… 고향 가도 농사지을 땅이 없어요. 보세요, 어느 직장에서 저를 받아주겠습니까? 사람들은 나병 환자인 양 취급하고 마주 보기도 꺼려요. 전염된다면서 말이지요.” 김상덕씨는 혈액 환자들에게 장애인 판정을 내리도록 관련법이 개정되기를 원한다. 신장이식수술 환자나 심장병 환자의 경우 장애인 판정이 내려진다.
“혈액장애도 장애로 받아들여라”
“저 일상생활 못해요. 장애인 법규정에 보면 6개월 이상 일상생활이 어려우면 장애판정이 내려지거든요. 혈액장애를 장애로 받아달라는 것이지요. 10년, 20년 일상생활을 못하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법규가 없다고… 말도 안 돼요.”
현재 국회에 입법청원을 해둔 상태다. 또 환자들에게 글리벡 약값만큼이나 절실한 문제가 혈소판 주사다. “수술 환자들은 혈소판 수혈을 받기 위해 직접 뛰어다녀야 해요. 병원에서는 검사비·시술비 모두 따로 받고 공여자도 우리더러 구해놓으라고 해요. 1인당 검사비만 해도 30만원이 넘는데 한 30명 정도 필요하거든요. 그 인원을 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환자 보호자들이 병원 복도에서 징징 울며 다녀야 해요. 아무나 잡고 혈액형을 물어보고 한번만 헌혈해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상덕씨는 백혈병 환자에 대한 병원쪽의 배려가 아쉬운 게 너무나 많다고 아픔을 토로한다. “의사, 약사, 병원 그 모두의 존재기반은 환자”라는 이들의 창립선언문 내용이 절실히 다가오는 순간이다. 사무실은 네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모두가 자리를 함께했다. 강주성 사무국장은 골수이식수술 한 지 3년이 되었다. 재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완치판정을 받는 데는 아직 2년이 필요하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나는 조그맣게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강 사무국장이 말했다. “우리는 시간이 생명이거든요. 살자고 하는 일인데 생명을 담보로 하면 안 되지요. 우리가 이렇게 한 지 일년이 지났어요, 결국 우리의 목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의료 소비자로서 환자들은 질 높은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그는 조용하지만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환우회’는 모두가 생명의 버팀목이 되어 함께 사는 의료현실을 ‘환자의 이름’으로 만들 작정이다. “질병에 의해 차별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은 ‘차별받는 이’들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상덕씨가 있는 사무실은 생명의 불꽃으로 밝혀져 세상 어느 곳보다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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