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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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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 들판이 잘 어울리는 남자

등록 2002-10-17 00:00 수정 2020-05-03 04:23

무공해 쌀 키우는 아늑하고 예쁜 마을, 평택 삼정리 공동체 세운 노한철씨

그는 자신의 땅을 미리 보여주었다. 동네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들판으로 앞장서 나가더니 말했다. “저어기, 저기까지가 모두 우리 마을에서 농사짓는 논입니다. 서울 사람들 사흘은 먹일 수 있는 쌀이 나오는 땅이지요.” 아산만 호수를 멀리둔 채 누런 평택들판이 가을 햇살 아래 잔잔하게 일렁였다. 저 들이 노한철씨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자랑거린지, 그의 표정으로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쉰여섯… 제가 우리마을 막내에요”

평택에서 좀더 들어가면 안중면 삼정리. 노한철씨가 삼정마을 공동체를 꾸리며 살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 나는 무농약 쌀은 맛있기로 이름나 있다. “우리 마을이라고 해서 모두 무농약은 아니고 단지별로 달라요. 저기 저쪽부터는 무농약 지대고 이쪽은 농약을 쓰는 쪽이지요.” 모두가 합심해 무농약 농사를 짓기는 무척 힘든 모양이었다. “유기농이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수시로 토양검사 받고, 추수 뒤에는 농작물을 수거해 농약 잔류를 점검하거든요. 누구든지 원한다고 금방 되는 게 아니에요. 4~5년 정도 땅에 공을 들여 준비기간을 만들어야 해요.” 아직 털지 않은 서리태콩을 만지며 그가 말했다.

“메뚜기가 많으면 모두 유기농으로 아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농약은 뿌릴 사람이 없어 못 뿌리지요. 대신 제초제를 뿌리는데 이게 풀은 죽이지만 곤충은 죽이지 않으니 메뚜기는 살아남는 거지요. 비료도 옛날엔 25kg이었는데 나이 먹은 이들 때문에 20kg이 나왔지요. 10kg도 나온다고 하네요. 무거워 싫다는 거예요. 쌀도 옛날엔 방앗간에서 80kg짜리로 막 지고 다녔는데 이젠 40kg도 무겁다고 하죠.” 유기농을 얘기하다 농촌에 사람이 얼마나 없는지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기는 금방이다. “집집마다 아들들이 있어도 모두 도회지로 나가고 없어요. 우리 마을에서 농사짓는 이로는 제가 막내라니까요. 올해 쉰여섯인데 말이에요.”

그를 따라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야트막한 담장 위로 탐스러운 호박이 앉아 있고 들장미는 담을 따라 높이 꽃을 피웠다. 그 아래는 들깨가 거꾸로 선 채 가을빛에 습기를 덜어내고 있었다. 마을이 참 아늑하고 예쁘다고 말했다. “아이고, 요즘은 손을 댈 수가 없어 모두 이 모양인데, 전에는 정말 여기 놀이터도 좋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지요.” 그는 풀숲에 가린 아이들 놀이터를 가리키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보기엔 어떤 시골 마을보다 정겹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동네건만 그에게는 지금 이 모습이 성에 차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더 많은 손들이 동네 길섶을 다듬던 그때 기억이 그를 에워싼다.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창고 겸 작은 작업장 안에는 두명의 마을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기농으로 키운 잡곡류와 콩이 봉지에 담겨졌다. 서울로 가는 물품들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물건을 가져갔는데, 이제는 날마다 평택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물건을 실어나갈 만큼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삼정마을 공동체는 15년 전 그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더 나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더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의 뜻은 호응을 얻어 모두 40여 가구가 동참했다. “지금은 18가구가 남아 있어요. 그동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탈퇴한 가구도 있고, 또 세대가 자연스레 소멸되기도 하고 해서요. 처음엔 모두 공동방식으로 공동작업을 했지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작업이 어렵잖아요. 더구나 기계화되면서 옛날 모습은 없어졌지요. 각자 자기 밭에서 일하고 있어요. 저기 보이죠” 콤바인이 이곳저곳에서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추수하고 있는 논으로 가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노인과 마주쳤다.

“형, 잠깐 기다려. 지금 어느 논으로 가는 거야” 노한철씨가 그 ‘형’을 불러 세우려 했다. 할아버지 형님은 손을 흔들어주며 벌써 저만치 가버렸다. 저 ‘형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예순일곱이에요.” 그가 싱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에서는 나이든 분들이 젊은이처럼 보인다.

괜히 큰소리 치며 사는 인생이 싫어서…

논에는 추수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줄줄이 서서 낫을 들고 벼를 베던 일은 아득한 선사시대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루에 1만5천평을 베내지요. 기계 덕분에 논농사 짓기가 많이 수월해진 건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그가 걱정스럽게 말을 잇는다. “저 쌀을 수매해야 하는데 그게 걱정이지요. 쌀을 잘 사주면 좋을 텐데. 이걸 어디다 갖다 파느냐 그게 걱정이에요. 쌀을 30가마 생산한다 치면 그걸 한몫에 팔아야 좋거든요. 목돈을 쥐어야지 영농자금 빌려쓴 것도 계산하고 기계 기름값이니 뭐니 들어간 것도 갚고 하지요. 오늘 한 가마, 내일 한 가마 팔면 어렵죠. 양곡수매가 늘 왔다갔다하니 참, 지난해는 쌀이 남아돌았는데 올해는 또 모자란다고 그러네요. 양곡시세가 얼마냐고 물으면, 옥황상제나 알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들 하는 말이 있어요.”

공동체의 농산물 판로를 책임진 그로서는 시름이 크다. “농사 짓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판로만 보장되면 밤잠을 안 자고 농사 지을 사람들인데….” 그가 콤바인을 타고 있는 농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후유, 힘들어 못해 먹겠어요.” 그가 한숨 쉬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농촌이 살아야 인간이 살지요.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이 누굴 믿고 사느냐고 해요. 윗사람이 잘해줘야 믿고 농사 짓는 건데 정책이 너무 자주 바뀌니 이젠 안 믿게 되죠. 그리고 농사를 지어 수지타산이 맞아야 하는 건데 그것도 안 되고…. 참, 우리가 그냥 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두손은 이십해 농사일로 마디가 박혔다. 군데군데 농기계를 만지다가 다친 흉터도 눈에 띈다. 스무 마지기 농사꾼인 그에게 왜 농사를 짓는지 물어보는 것은 아마 실례일 것이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농사일 대신 책상 위에서 사무를 보는 일을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전직은 공무원이었다. “남의 등을 치면서 사는 삶일 것 같아 싫었어요. 말 그대로 사기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남에게 괜히 큰소리나 치는 그런 인생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고향으로 돌아와 낯익은 농사일을 하니 몸은 비록 고달프지만 마음은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스스로 다짐한 농부로서의 인생이기에 그의 삼정마을 공동체 운동은 더욱 의미가 있다. “남이 잘 되면 좋잖아요. 더불어 나도 잘 살 수 있고요.”

30년전, 어느 할머니의 기부

그는 마을을 바꾸고 싶었다. 자신의 고향 마을을 바꾸고, 옆동네를 바꾸고, 그리고 또 다른 옆동네를 바꾸고….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더욱 살기 좋은 마을들이 자꾸자꾸 생기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다. “잉크가 물에 떨어져 번지듯 그렇게 말이죠.” 그의 정성으로 이제 옆동네에서도 공동 작업에 참여하는 가구수가 늘어났다. “그런데 사실, 바뀌는 것은 어느 한 순간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게 더 힘든 것 같아요.”

삼정리는 다른 마을보다 특이한 이력이 있다. 약 30여해 전 이 마을에 살던 한 할머니의 기부 덕분이다. 그 할머니는 후손 없이 홀로 살다 돌아가실 때 재산을 모두 마을에 남겼다. 논밭 수천평이 마을의 재산이 되었다. 노인회에서 관리하는 이 재산 덕에 이 마을은 농협빚을 거의 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하는데 우리 마을은 그래도 경제적으로 사정이 괜찮은 거죠.”

노한철씨는 두레마을에 특히 감사하고 싶다고 한다. 두레마을은 이 마을의 유기농산물을 도맡아 판매해주기 때문이다. “두레마을이 우리가 안심하고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안정된 가격으로 구입해줬으니까요. 그 해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면 평년대로 쳐주고 해서 늘 생산이 유지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거죠. 잘못된 게 있으면 거래를 끊는 게 아니라 조목조목 지적하고 충고해주면서 10여해가 넘었어요.” 든든한 동지를 가진 듯 그의 표정이 편안하다.

요즘 만나는 도회지 사람들은 시골을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꼽는다. 그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올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이게 우리 뿌리잖아요. 뿌리가 없으면 어떻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겠어요. 사실 하는 일만큼 수입이 보장이 되지는 않지만 너무 성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농사를 지으면 땅은 속이지 않아요. 하는 대로 나오고 뿌린 대로 거두는 게 땅이잖아요. 다만 그 이하로 나오면 게으름 피운 탓입니다. 하하하….”

우리는 논길 한가운데 트럭으로 갔다. 일꾼 둘이서 트럭 바닥에 어마어마하게 큰 포대를 준비한 채 서 있었다. 콤바인에서 탈곡한 벼를 큰 포대에 담기 위해서다. 그럼 오늘이 추수하는 날! 이쯤되면 새참을 이고 오는 아낙들의 발길이 기다려질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고, 요즘 누가 그런 거 가지고 온대요. 다 일 나가고 없어요. 정 먹고 싶으면 전화 하면 식당에서 배달 와요.” 뭐든지 시켜먹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모두 빈 논둑길을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노한철씨에게 들판 한가운데로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논으로 쓱 들어가니 벼들이 저절로 품을 열어 그를 반기는 것 같았다. 난 그가 저 나락 속으로 스며들지 않을까 순간 놀랐다. 진짜 농부. 아니,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면 모두 저렇게 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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