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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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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죽지 않는다, 젊어질 뿐이다

등록 2002-06-06 00:00 수정 2020-05-03 04:22

앰네스티 역사상 가장 고령의 상근자 댄 존스, 인권그림을 들고 인권영화와 만나다

영국 인권운동가 댄 존스(61)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민중화가 홍성담 화백의 어머니께서 물으셨단다. “얘야,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냐?” 올해 일흔이 넘으신 그 자당께서 댄을 처음 만난 것이 1991년, 댄이 감옥에 갇힌 홍성담씨를 만나러 광주에 갔을 때다. 그때 분명히 수염이 허연 영감이었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니 놀랄 일이라는 말씀이다. 수염 덕분에 오래 전부터 완전히 ‘할아버지’ 취급을 받았지만 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자신이 ‘노인’인 것을 인정한다.

비닐봉지에 담겼던 그때 그 크레용

“나는 나이 든 늙은 활동가입니다. 나이 들었다는 말과 현역 활동가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게 들릴지 몰라도 내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노활동가’의 그림전시회는 올해 인권영화제 행사의 하나로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주최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광화문의 시네큐브극장 안 갤러리에서 선보이고 있다. 월드컵과의 대결에서 한발 물러선 ‘일반 영화판’에 ‘인권영화’와 댄 존스의 ‘인권그림’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전시회 날짜도 아예 월드컵 개막식 전야에 맞췄다(이어서 6월16∼22일 지하철 혜화역에서도 열림).

“런던의 친구들은 내가 축구 구경하러 한국에 간 걸로 해석했다”며 댄은 웃는다.

그는 한국의 양심수나 인권운동가들 사이에는 워낙 잘 알려진 사람이다. 1970년대부터 김지하, 서준식, 서승 형제, 김대중 등 수많은 양심수들을 위한 탄원서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87년 6월항쟁 때는 최루탄을 맞으며 서울의 현장에 있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의 인권단체들과 만나며 캠페인을 함께 하고 인권교육을 도왔다. 지난번 광주항쟁 20주년 기념식에는 그 공으로 초대를 받았다.

내가 댄을 만난 지도 벌써 십년이 훨씬 넘었다. 당시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권운동을 돕고 있던 나 역시 그를 할아버지로 여겼다. 그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활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크레용 봉지 때문이었다. 그는 몽당연필보다 더 닳고 닳은 크레용을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들고다녔다. 사람을 만날 때나 혹은 길을 가면서 틈틈이 그 봉지를 꺼내 그림을 그리곤 했다. 댄을 한참이나 못 보는 동안에도 난 늘 그 크레용 봉지가 잘 있는지 궁금했다.

“내게 그림은 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을 기록해오는 것이지요.”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의 현재는 부모로부터의 영향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예술가적 기질은 유대인 어머니로부터, 인권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2차대전 뒤 나치 잔당을 단죄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쪽의 검사로 활약했고 나중에 노동당의 법무장관을 역임한 엘윈 존스다. 청렴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단 한푼의 유산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그 대신 꺼지지 않는 정의의 열망을 물려주었다. 댄 역시 물으나마나 노동당원. 그 중에도 올드 레이버다. “요즘은 점점 내가 공룡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새 노동당’에 의해서 서식지를 점점 빼앗겨 더 이상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란다.

학교 졸업 뒤 서아프리카로 떠나다

댄의 영원한 동지인 아내 데니스는 현재 런던 동부의 서민지역인 타워햄릿구의 구의원이다. 둘 모두 사람 좋고 열심히 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존재들. 런던에서 열리는 노동조합 집회, 인종차별 반대모임, 인권집회에 이 부부가 빠지면 그건 집회가 아닐 정도다. 수상관저인 다우닝 10번가에 하도 찾아가서 탄원과 항의를 하니 경비경찰과 댄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고 심지어 수상과도 알게 되었다. 존 메이저 수상 당시,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에서 저지른 인권탄압에 항의하러 다우닝 10번가를 찾아갔을 때, 댄이 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메이저 수상은 그를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듣고 헤어질 때 함께 기념촬영까지 한 적이 있을 정도다.

댄 존스를 인권활동가와 예술가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얘기해야 하는지는 사실 난감한 일이다.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동화작가이기도 한 그는 영국 내에서 ‘로열 아카데미’나 ‘화이트 채플 아트 갤러리’ 같은 유수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그림은 그 유명한 영국노총(TUC)과 지역사회단체 곳곳에 걸려 있기도 하다.

이번에 전시된 그림 중 가장 가슴에 남아 있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댄은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한 그림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림 동화책 크기만한 액자였다. .

“피노체트 독재하에서 사라지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가족을 만나고 나서 바로 그렸지요. 한순간에 쉬-익, 이틀 만에 완성했지요.”

그의 걸음은 자연스레 움직이더니 대형 그림 앞에 멈췄다. . “1979년 시위 도중 사망한 내 친구입니다. 노동조합원이었으며 교사였지요. 런던 내 주로 아시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파시즘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에 경찰에게 맞아서 죽었지요.”

쓰러진 육신의 모양을 따라 시위대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고 다친 머리에서 솟구치는 피는 나부끼는 붉은 깃발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친구를 잃은 댄 존스의 마음이 읽혔다.

어릴 때부터 동물과 자연에 대해 관심이 깊었던 그는 학교 졸업 뒤 바로 자신의 ‘방랑벽’을 살려 서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한 공동체의 자원활동가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라이베리아에 입국할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댄은 공항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항목이 적힌 입국 신고서류를 받았다. ‘당신은 무슨 부족 출신인가?’ 그는 ‘웨일스-유대인 혼합족’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다음 질문은 더 어려웠다. ‘부족의 얼굴 마크를 표시하시오.’ 한참의 고민 끝에 결국 ‘특별한 마크 없음’이라고 썼다. 그래도 무사히 통과해서 일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억압적인 나날조차 축제의 모습으로

댄은 주로 청소년과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면서 활동가로서의 삶을 계속해왔다.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의 노동문제, 법률문제, 인종문제, 비행청소년과 전과자 상담 등에 두루 관여하면서 자연스레 인권문제로 닿았고 앰네스티 런던지부에서 캠페인 및 교육 담당으로 일한 지 올해로 15년이 되었다. 그는 세상을 많이 찾아다녔다. 주로 어렵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 지치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실종자를 부모로 둔 어린이들, 자식을 감옥으로 보낸 부모들, 인종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의 동네, 갈 곳 없는 성적 소수자들의 쉼터, 배움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학습장애자들의 학교….

그의 모든 그림은 그의 발길을 구석구석 세밀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림 속에는 슬픔의 그림자가 좀처럼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런던 부두노동자들의 척박한 생활이나 멕시코 여성들의 억압적인 나날조차 오히려 춤이나 축제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의 유머러스한 성품과 낙관주의자적 삶의 자세는 어린이를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 이 그림의 대형원판은 영국 어린이협회 회관 전면에 걸려 있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온갖 인종의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이를 하면서 뛰노는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아이들의 옆에는 노랫말이 하나씩 쓰여 있다.

“아이들이 부르는 놀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 많아요. 그 안에서 역사를 읽고 사회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는 내게 어릴 때 동무들과 잘 부르던 노래가 있느냐고 물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댄은 즉시 메모할 자세를 취한다.

“모든 나라의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면서 부르는 노래를 모아서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요.”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들 옆의 노랫말을 설명하는 댄의 눈빛은 천진한 아이 것과 닮아 있다. 스스로 ‘늙은 말’처럼 나이가 들었다고 하지만 이 사람 안에는 어리고 순진한 아이 하나가 들어 있는 게 아닐까?

“하하하… 그래요. 사실 그 아이가 자꾸만 뛰쳐나오려고 해서 억누르느라고 아주 힘이 들어요.”

댄은 앰네스티 역사상 가장 고령의 상근자로 활동 중이다. 그는 자기 때문에 조직이 ‘은퇴에 관한 규정’을 따로 만들어야 할 정도라고 농담한다. ‘이제 그만 쉬어도 좋다’고 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할 작정이다. 그는 ‘만년 활동가’로 사는 삶이 진정 즐겁다. 나이를 초월한 현역 인권운동가(human rights activist)! 노병은 죽지 않는다, 더욱더 젊어질 뿐이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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