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리 뮤지컬, 밀리지 않습니다”

등록 2002-11-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창작극만 고집해온 의 연출가 권호성씨… 이 부럽지 않다

겨울비가 내리는 저녁 을 보러 갔다. 극장 안 객석으로 사람들이 자리를 찾아들고 있었다. 조금 전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한 중년부부가 앞줄에 앉아 있었다. 우산을 나눠 쓰고 온 부부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왜 그들은 좀더 편안한 주제와 화려한 무대, 유명 브랜드의 뮤지컬 대신 을 택했을까

“취향이지요. 취향.” 연출가 권호성씨는 간단하게 말했다. ‘대형 스타도 없고 주제도 우울한’ 뮤지컬을 굳이 보러 오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하다는 분석이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만들면서 우리는 창작극을 하자고 다짐했어요. 창작극을 통해 우리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죠. 국제화시대에 우리 것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 전통문화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창작해서 보여주자는 것이었지요. 그게 89년이었는데 상당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객석을 채운 베트남전 용사들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살펴보니 산지사방에 사연이 널려 있었다. 파편으로 흩어진 역사의 잔해들. 그는 무슨 사명감인 양 작품을 만들어 공연을 올렸다. “은 동학혁명 당시 우금치 전투에서의 얘기고, 는 우리나라 해방 전후 유민들의 역사고, 는 민족음악가 김순남 선생의 얘기고….”

취향이 상당히 ‘이쪽’인 것 같군요. “네, 그래요. 안 가려고 발버둥치는데도 자꾸 이쪽으로 가게 되는 게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런 극들이 관객들에게 좀 먹혔나요 “안 먹혔죠. 허허허…. 지금도 안 먹히는데요.” 인상 좋은 노총각인 그가 남의 일처럼 편하게 웃는다.

“사실 가끔 이런 생각해요. 내 나이가 벌써 마흔인데 맨날 이렇게 돈 안 되는- 우리 어머니 께서 늘 이렇게 표현하시지요- 걸 하고 있으니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돈 되는 거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해요.”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남들처럼 그도 요리조리 따져 대박터질 상업극을 무대에 올려 차라리 ‘학 다리가 오리 다리 될 때’를 기다리는 게 나을 성싶다.

권호성씨는 원래 공대생이었다. 2학년까지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연극영화과로 가서 공부를 했다. 극단 ‘에저또’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부친이 월남전 참전군인이었지만 베트남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다. 공연 중에 우연히 고엽제 환자 사진전을 보며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때 그곳에 간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모아 작가가 작품을 쓰고 그가 연출했다. 연출하면서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비로소 끄집어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가하셨지요. 전쟁 거의 끝날 무렵일 겁니다. 아버지가 보내오신 편지와 소포에서 베트남 냄새가 났어요. 레이션 박스도 오곤 했는데 커피봉지는 동네 다방에 팔았어요. 그때 TV가 한대 왔는데 얼마나 좋던지. 맨날 주인집 형 눈치 보며 만화영화 보다가…. 그런데 한달 안 가서 다른 사람한테 팔아야 했죠.”

그가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골목을 누비며 부른 맹호부대 용사의 노래가 에 나온다. “그때는 우리가 몰랐지요. 월남 파병식 뒤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이 뒤따랐는지, 그 상처에 책임질 이가 아무도 없는 지금의 현실에 정말 화가 나요.”

이 공연을 처음 올렸을 때 월남 참전군인들이 거의 날마다 보러 왔다. 파병식 장면에서는 객석에 있던 ‘역전의 용사’들이 모두 일어나 일제히 팔을 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굉장히 놀랐어요. 그분들은 봇물 터지듯 자신들의 감정을 열어놓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동안 누구도 물어주지 않은 얘기들이었어요. 묻는 이 없어 대답도 못하던 그런 사연이 쏟아져나오는 듯했지요.” 당시 공연을 본 그의 부친은 베트콩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대목을 지적하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고칠 것을 명령했다. 물론 아들은 연출가의 이름으로 맞섰다.

출연진들 노 개런티 선언

은 96년에 초연됐다. 장장 6년간이니 이젠 연출가 없이도 그냥 굴러갈 만한 거 아닌가 “하하, 그러면 저도 좋겠는데요. 작품이 계속 변하니 연출자가 자리를 지켜야 해요. 이번에도 곡이 새로 들어가거든요. 초연 때 본 분들은 아마 놀라실 거예요. 처음엔 연극 중심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오페레타 형식이 더 많지요. 그래도 나 , 이런 뮤지컬보다는 드라마적 요소가 많지요.”

예전보다 뮤지컬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외국여행 가서 ‘본토’ 뮤지컬을 보고 오는 사람들이 많고, 라이선스 계약으로 국내공연이 잦으니 뮤지컬은 이제 더 이상 감상하기 어려운 공연이 아니다. “눈이 보배예요.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져 옥석을 가리는 정도까지 됐어요.” 외국 대형 뮤지컬과 경쟁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그가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아니오. 작품성에서는 저희도 아이디어가 뒤진다고는 생각 안 해요. 딱 한 가지 뒤지는 것이 있다면 자본력이지요. 작품을 꾸준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게 결국은 자본인데 시간도 부족하고 자본까지 열세니 어렵지요. 정부 정책이나 기업들이 밀어주는 힘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뮤지컬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자신합니다.”

은 국내에서 주는 상이란 상은 거의 다 받았다. 그러나 이 공연은 마땅히 받아야 할 지원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처음에도 맨주먹 붉은 피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렇다. 결코 꽉 찼다고 할 수 없는 객석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래도 먹고살 만한 거죠 “으로는 먹고살 수 없어요. 지난번 국립극장 공연 때 워낙 빚을 많이 져서요(순전히 관객동원이 어려운 탓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을 그만둘까 했지요. 그런데 출연진 모두 노개런티 선언을 하는 바람에 지금 올릴 수 있게 된 겁니다.”

아니, 배우들이 모두 한푼도 안 받고 출연한다는 얘긴가요 “안 받는 건 고사하고 다른 데 가서 돈벌어 여기 쏟아붓는 거죠.” 택시기사, 다른 극단 출연, 영화 출연, 커피숍 아르바이트 등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단다. 당연히 연출가도 다른 일을 “저는 음악 일을 합니다. 제가 작곡을 하고 있으니 일거리가 여기저기 있긴 합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보셨는데.” 그는 어머니가 장가갈 생각도 하지 않는 아들 걱정이 대단하다며 능청을 떤다.

꿈속에서나 볼 듯한 등불축제

의 무엇이 그를, 그의 극단을 이렇게 잡고 있는가 “작품이 좋아서죠. ‘이 작품만은 적당히 그냥 내릴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일념이지요.”

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하하하…. 관계요 없지요. 이 두 연인 간의 얘기에 초점을 맞췄지만 우리는 역사적인 배경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지요.” 에는 헬리콥터가 무대 위에서 내려온다. 그 볼거리를 제외하면 의 무대도 전혀 밀릴 게 없다. 특히 등불축제는 너무나 아름다워 꿈속에서나 볼 듯한 장면이다.

저녁공연만 있다가 요즘은 오후 3시 공연도 있다. 입시준비에서 좀 놓여난 고 3학생들이 단체 로 온다. “학생들은 특히 반응이 빨라요. 어른들은 결코 웃지 않는 대목에서 막 넘어가게 웃기도 하죠. 그러다가도 마치고 나갈 땐 모두 숙연해져요. 그런 걸 보면 ‘아, 내가 좋은 작품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은 11월까지만 공연하고 내년 후반기에 다시 올릴까 한다. 열렬 팬들이 만든 ‘블사모’(블루 사이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가운데는 공연을 10번 이상 본 사람도 있다.

영화든 연극이든 뭐든지 ‘취향’이 다르니 직접 보기 전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서 ‘진짜 뮤지컬’이라는 몇몇 작품에 빠져본 나로서 감히 말할 수 있다. 은 놓치면 후회 막심할 것이고, 보고 나면 ‘잘 봤다’는 느낌으로 가슴이 충만할 작품이라고.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