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에반게리온)에 타라, 신지.”
199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끈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첫 화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에게 아버지 겐도가 한 대사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탈 거면 빨리 타라”라는 비슷한 대사가 있을 뿐. 이 대사가 여전히 ‘진짜’로 여겨지는 이유는, 아마 신지의 당혹감을 이만큼 잘 표현하기도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대뜸 거대한 전투병기에 타서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 사도와 싸우라고 명령했을 때, 고작해야 중학생이 얼마나 의연할 수 있겠는가.
역사학자 요나하 준은 반대로 아들 신지가 아닌 아버지 겐도에 주목한다. 저자가 스스로 역사학자로서 쓴 마지막 책이라 평가하는 <헤이세이사>는 1989년부터 2019년까지의 헤이세이 시대를 ‘아버지의 부재’라는 열쇳말로 이해하려 한다. 쇼와 일왕의 죽음으로 막을 연 헤이세이는 공교롭게도 현실사회주의 소련이 붕괴한 시기이기도 했다. 좌파와 우파 모두 ‘모범’으로 여겨온 아버지를 잃어버린 셈이다. 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갑작스레 아버지 역할을 떠맡은 전공투 세대의 고군분투야말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물론 작품이 만들어진 헤이세이 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의탁할 권위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맞서 싸워 언젠가는 무너뜨려야 할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언어를 날카롭게 벼려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1996년 두 명의 전후 지식인인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사카 마사타카의 사망은 이러한 ‘언어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펼쳐진 흐름은, 정신분석 비평의 선구자 에토 준의 자살과 마초 성향의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의 도쿄도지사 당선이 보여주듯 언어에서 신체로의 전환이었다.
언어라는 분석의(分析醫)를 잃어버린 신체의 폭주는 일본을 맥락 부재의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서부극을 좋아하면 친미,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 진보라는 식의 즉물적이고 단편적인 판단이 횡행했다. 좌와 우 모두 과거를 멋대로 끌어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비판적 지식인’ 우치다 다쓰루가 2016년 헤이세이 일왕의 퇴위 표명 ‘말씀’을 아베 정권의 개헌 시도 저지로 단정하며 “천황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모습은 그 극치다. 과거 좌파에게 무너뜨려야 할 아버지였던 일왕이, 어느새 평화헌법의 수호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 헤이세이는, 역사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지은이가 생각하는 역사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역사란 언어를 통해 만들어낸 그럴싸한 세계관이자, 과거와 현재를 올바르게 연결하는 능력이다. 상대가 가진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타협과 조정의 기예를 발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역사의 죽음은 곧 이 모든 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역사를 잃어버린 시대의 역사를 써내려간 이 아이러니한 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때 젊은 천재 역사가로 주목받았지만 양극성장애를 앓은 뒤 대학을 사직하고 “역사학자 폐업기”까지 쓴 지은이는, 맺음말에서 더 이상 예전 같은 의미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다고 못박는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과거를 향해 던진 흰 공이 되돌아오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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