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 632년.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집어든 독자는 언제인지 정확히 감이 잡히지 않는 소설 속 시간에 일단 어안이 벙벙해진다. A.F.란 ‘포드 이후’(After Ford), 구체적으로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모델 T’를 처음 만든 1908년을 원년으로 삼는 기년법이다. 헉슬리의 소설에서 포드는 그저 자동차회사 사장 정도가 아닌, 신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다. 알파부터 엡실론까지 다섯 등급으로 사람을 ‘찍어내고’, 개인을 오로지 소비하는 존재로만 취급하는 소설 속 세계관은 포드가 처음 도입한 컨베이어벨트와 그것이 만들어낸 대량생산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테판 J. 링크의 <글로벌 포드주의 총력전>(오선실 옮김, 너머북스 펴냄) 역시 현대를 만든 중요한 기원 중 하나로 포드주의에 주목한다. 다만 이때의 포드주의는 헉슬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링크에 따르면 포드주의란 역사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래할 생산양식도, 더 효율적으로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한 자본과 기업의 방책도 아니다. 미국 중서부의 독특한 개성과 포퓰리즘이 빚어낸 우연과 투쟁의 산물이다. 포드사가 있는 디트로이트는 농민이나 장인 같은 ‘생산자’를 우대하는 오랜 전통에 더해, 뉴욕과 보스턴 등 동부 대도시의 엘리트와 금융 자본가에 반감을 간직한 곳이었다. 다름 아닌 포드부터가 중서부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포드가 자동차란 신사들이나 타는 최고급 마차라는 이전까지의 고정관념을 거부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기술은 곧 공공재이고, 기업은 주주가 아닌 생산자의 이익에 복무해야 하며, 자동차는 모든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도덕경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포드가 시카고의 공장식 축산업에서 영감을 얻어 대량생산체제의 포문을 열었음에도 엔지니어의 고유한 경험과 기지를 인정하고, 노동조합에 끝까지 반대했음에도 노동자를 위한 학교를 짓고 그들의 복지에 신경 쓰는 등 얼핏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인 것도 이런 ‘중서부 포퓰리즘’의 영향이었다. 흔히 노동자에게 자기네 자동차를 팔아먹으려는 노림수로 여겨지는 ‘일당 5달러 임금제’도 사실은 수익에 대한 배당금에 가까웠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포드의 독특한 비전이 가진 호소력은 중서부를 넘어 세계로 뻗어갔다. 그가 대필작가 새뮤얼 크라우더의 도움을 받아 쓴 자서전 <나의 삶과 일>은 출간 2년 만에 12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특히 자유주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주목했다. 반자유주의 우파는 <나의 삶과 일>을 공동체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위계적이고 유기체적인 새로운 경제질서를 제시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극복하는 책으로 받아들였다. 반자유주의 좌파 역시 <나의 삶과 일>이 기술관료의 합리주의와 노동대중의 평등주의적 열망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는 책이라 여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좌우를 망라한 반자유주의자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맞서고자 미국인 포드의 자서전을 ‘바이블’ 삼은 것이다.
포드주의의 전 지구적 영향은 단지 신념을 공유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반자유주의의 두 기수였던 나치 독일과 소련은 적극적으로 포드주의를 이식하려 했고, 포드사 역시 생산자 중심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이든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심 때문이든 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런 만큼 미국과 독일, 소련의 자동차 공장들의 관계란 경쟁이었다기보다는 전 지구적으로 포드주의를 구축하는(forging) ‘동맹’이나 ‘연대’에 가까웠다. 그 점에서 1930년대 전간기란 세계화가 후퇴한 시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시기일 뿐이라는 지은이의 통찰은 퍽 의미심장하다. 중서부 ‘러스트 벨트’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가 촉발한 ‘탈세계화’ 시대, 이 책이 줄 시사점이 적지 않을 듯 하다.
유찬근 대학원생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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