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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을거치며 비로소 국민이 됐다

‘전쟁과 평화’ 1부 - 역사는 평범한 개인의 의지가 모일 때 앞으로 나아간다
등록 2023-01-07 02:16 수정 2023-01-07 14:12
2020년 6월25일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서울공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70년만에 조국에 귀환한 147구의 호국영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현단에 모셔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20년 6월25일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서울공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70년만에 조국에 귀환한 147구의 호국영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현단에 모셔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빌라르스키가 옆에서 러시아의 가난과 유럽보다 낙후된 점, 무지를 끊임없이 불평하며 지껄이는 말도 피에르에게는 기쁨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빌라르스키가 시체처럼 생기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피에르는 놀랍도록 강렬한 생명을, 눈 덮인 그 광활한 공간에서 하나가 된 이 특별한 사람들 전체의 삶을 지탱하는 힘을 보았다.” ―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4권 4부

2020년 6월25일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서울공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70년만에 조국에 귀환한 147구의 호국영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현단에 모셔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20년 6월25일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서울공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70년만에 조국에 귀환한 147구의 호국영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현단에 모셔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여수에서 화천으로, 폐허에서 삶으로

강원도 화천은 수복지구다. 38선 이북이던 땅을 6·25전쟁 당시 되찾아 수복지구라 부른다. 아버지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다. “서부지구 유엔군은 설렁설렁 싸워 땅을 빼앗겼지만 동부지구 국군은 악착같이 싸워 우리 땅을 이만큼 넓혀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벅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기자부대 포병의 훈련 소리가 그치지 않던 황량한 겨울 들판조차 소년에게는 아주 각별한 공간으로 새겨졌다.

전쟁은 통째로 삶을 바꾼다. 아버지 삼 형제는 한 부대에서 전쟁을 치르며 전남 여수에서 강원도 화천까지 왔다. 큰어머니 두 분은 전후, 남도의 맛깔스러운 음식 솜씨만 가지고 연고도 없는 전방 마을에 정착했다. 안방에서는 늘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폭격으로 상한 한쪽 귀를 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소독했고, 돌아가실 무렵에는 양쪽 귀 모두 세상과 단절했다. 삶이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오직 맨손으로, 다른 아버지들처럼, 아버지 삼 형제는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을 일궜다.

전쟁의 참혹함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전쟁의 원인 분석도 전쟁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단지 1950년 6월25일, 전화 속으로 뛰어든 젊은 아버지들, 그 개개인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그들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제 소학교에서 기미가요를 배우고 차별에 익숙해지며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여졌다. <태백산맥>의 염상진·염상구 형제처럼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기에는 선구자 기질이 부족했고, 임시정부는 너무 멀리 있었다. 목숨 바쳐 지켜야 할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3·1 만세운동으로 싹튼, 민족이라는 평등한 공동체 의식도 갈 길이 멀었다.

평범한 아버지들이 비로소 ‘자신’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대면한 곳은 전쟁터였다. 전우를 위해, 묵직한 느낌을 주는 어떤 목표를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버지들은 식민지 백성의, 보잘것없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 전체의 삶을 지탱하는 힘’을 보았다.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처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강렬한 생명’을 느꼈다. 아버지들은 그렇게 국민이 됐다. 악착같아진 까닭은 그것이다. 무용담인 줄 알았던 아버지의 말 행간에는 존재 가치를 증명한 한 개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은 한국인의 역사와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것은 많은 곳에서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요소로 작용했다 (…) 한편으로는 전쟁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하면서 전후 한국은 사회변화와 세계적 위상 두 수준 모두에서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격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명림, 〈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한국전쟁과 한국정치의 변화’

<전쟁과 평화 4> 레프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민음사 펴냄, 2018년

<전쟁과 평화 4> 레프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민음사 펴냄, 2018년

민주화의 초석을 다진 전쟁터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 자체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통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점차 자기 안의 커다란 잠재력과 힘을 자각했다.”(연진희, 〈전쟁과 평화〉 4권 작품해설, ‘변두리에서 중심을 바라보다’) 6·25전쟁 역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머물지 않았다. 아버지들의 삶은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근면함으로,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정신으로 다양하게 표출됐다. 유엔군 참전으로 아버지들의 세계사적 인식도 한껏 커졌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국가들 간의 동맹과 연대, 근대화의 중요성을 깊이 각인했다. 비민주, 부정부패, 도덕적 해이를 묵과하지 않게 된 내면의 성장도 간과할 수 없다. 민주화의 초석이 그곳에 있었음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2020년 6·25전쟁 70주년을 앞둔 두어 달 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나에게 생각을 물었다. 두어 달 전은 이례적으로 이른 시간이었다. 의견을 말씀드렸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새해 들어 고민의 상당 부분을 6·25전쟁 70주년에 할애하고 있었다. 수복지구에서 자란 소년에게 6·25전쟁은 아버지 삼 형제의 인생 전부이기도 했고, 6·25전쟁의 제대로 된 기억과 평가 없이 한반도 평화 또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라 일찍부터 생각해온 터였다. 많은 시간 공들여 손보고, 대통령과 여러 번 성의를 가지고 검토했다. 평범한 국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로 전진하려는 대통령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극기와 촛불이 한마음으로 물결치면 좋겠다는 소망이 커졌다.

“6·25전쟁은 오늘의 우리를 만든 전쟁입니다. 전쟁이 가져온 비극도, 전쟁을 이겨낸 의지도, 전쟁을 딛고 이룩한 경제성장의 자부심과 전쟁이 남긴 이념적 상처 모두 우리의 삶과 마음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70년이 흘렀지만 그대로 우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참화에 함께 맞서고 이겨내며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났습니다. 국난 앞에서 단합했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킬 힘을 길렀습니다. (…) 가장 평범한 사람을 가장 위대한 애국자로 만든 것도 6·25전쟁입니다. (…)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도 6·25전쟁이었습니다. (…) 모든 이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마음은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손잡을 수 있습니다. (…) 6·25전쟁을 극복한 세대에 의해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습니다. (…) 남과 북, 온 겨레가 겪은 전쟁의 비극이 후세들에게 공동의 기억으로 전해져 평화를 열어가는 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문재인, 6·25전쟁 제70주년 기념식 연설, 2020년 6월25일

<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정성호·박명림·장상환· 강인철 지음 백산서당 펴냄, 1999년

<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정성호·박명림·장상환· 강인철 지음 백산서당 펴냄, 1999년

“가장 평범한 사람을 가장 위대한 애국자로”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는 559명의 등장인물 개개인에게 독자적인 눈과 목소리를 부여한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영웅의 의지가 아니라 개개인 국민 의지의 총합임을 숭고한 깨달음으로 알려준다. 러시아가 톨스토이를 낳고 또 스탈린을 낳은 것은 끊임없는 인류의 전쟁사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비극적 서사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전쟁을 체험한 우리에게 〈전쟁과 평화〉가 왔을 때, 더 진지하게 읽혔다. 아버지들의 책꽂이에서, 김대중과 문재인의 서재에서, 단 한 사람의 소중함도 잃지 말라는, 작은 씨앗을 뿌려놓았다.

우리가 전쟁을 반대한다고 전쟁이 그저 가만히 있어주진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아자 가트는 “현재로서는 대량살상을 초래하는 기술과 무기의 확산, 그런 기술과 무기를 사용할 법한 사람들을 전세계에 걸쳐 엄중히 단속하는 것만이 그 위협에 맞서는 단 하나의 유용한 대응책”이라 한다.(〈문명과 전쟁〉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최종 무기, 그리고 세계’) 세계적인 전쟁 연구자도 근원적으로 전쟁을 막을 방법에 답하기에는 고려할 것이 너무 많았을 테다. 하긴 팍스로마나나 팍스아메리카나와 같이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평화조차 강력한 군사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도 중심에 가까운 일부의 안전과 평화였지 변두리에서는 다툼이 계속됐다.

<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펴냄, 2017년

<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펴냄, 2017년

평화를 향한 의지 모아주기를

화천은 여전히 전방의 분단 마을이다. 아흔이 넘은 둘째 큰아버지만 겨울을 지키고, 대부분의 사촌은 자기 역사에 바빠 아버지들의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끔 서운함이 드러나도, 그것 때문에 가족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가족들에게, 산천어 축제를 준비하는 수복지구의 군민들에게, 안개 속 강물처럼 저기 어디 분명하게 평화가 깃들어 있다. 전쟁을 막는 길은 개인의, 가족의, 지역의 잇따른 평화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본보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분단은 그대로고 냉전이 떠난 자리에 반목이 계속되지만, 그것은 아버지들이 ‘세계의 방어자’라는 자부심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시간이다. 아버지들이 전쟁터에서 국가를 대면한 지 70년이 넘게 흘렀다. 이제 아버지들의 국가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 갈 만큼 힘이 세다. 이해 못할 자손의 다양한 목소리들 역시 아버지의 다른 목소리이며 한 사람 국민의 목소리이다. ‘세계의 구원자’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평화를 향해 의지의 총합을 만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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