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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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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방랑하는 유서가 되어 [손바닥문학상]

제14회 손바닥문학상 대상 수상작
등록 2022-12-24 06:01 수정 2022-12-28 01:05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하여간 지구란 것은 버릇없기 짝이 없다. 나를 이렇게 고생이나 하게 만들고. 흠, 아닌가. 지구는 인격체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구는 불에 탄 개미 사체다. 지구는 바닥에 달라붙은 껌이다. 지구는 물에 씻은 솜사탕이다. 이거 꽤 말이 되는걸. 지구는 학사경고장이다. 오, 어감 좋고.

나는 흥얼대며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인다. 잔잔한 사랑 노래, 삶을 푸념하는 가사, 우울한 이별곡들을 한참 넘기자 그제야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온다.

-날아가, 저 멀리 펼쳐진 바다를 향해서.

오래된 파일답게 음질이 영 깨끗하지 못하다. 그래도 밑도 끝도 없이 암울해서 듣는 사람까지 축 처지게 하는 다른 것들보다는 낫기에, 나는 음악을 들으며 방향을 튼다.

-경고. 11시 방향에서 빠른 속도로 미확인 물체 접근 중. 방향 전환 요망.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 ‘경고’라는 단어에 신물이 난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분명히 ‘경고’일 것이다. 그놈의 경로 이탈. 애초에 정확한 경로는 알아낼 방법도 없어서 때려 맞히다시피 날조한 거면서. 탁자 앞에 앉아 머리나 벅벅 긁으며 대충 직직 그려낸 예측 경로보다 현장에서 내가 직접 보면서 계산하는 경로가 더 정확하다니까? 이대로만 가면 예상보다 몇십 년은 일찍 도착한다고.

반사적으로 투덜대다 말고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잠시만. 방금, 경고 다음에 나온 말이 경로 이탈 중이라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매일같이 들었던 경로 이탈 경고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면,

-경고. 12만㎞ 밖, 11시 반 방향에서 초속 2만㎞로 추산되는 미확인 물체 접근 중. 즉각적인 방향 전환 요망.

이런, 젠장. 충돌 경고였다!

그러게 경고를 작작 했으면 내가 경고라는 단어에 경각심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나는 욕을 짓씹으며 재빠르게 방향 전환 준비를 한다.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가는 그 힘을 못 이기고 기체 내부가 진탕이 될 위험이 있다. 안에 들어 있는 무수한 승객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젠장, 어쩔 수 없이 나는 5초에 걸쳐 최대한 서서히 방향을 틀어야 한다.

점차 경고 알림의 빈도가 잦아지고 새롭게 경고문이 갱신될 때마다 미확인 물체와의 거리는 초조할 정도로 짧아진다.

-경고. 1㎞ 밖, 11시50분 방향에서 초속 1.9만㎞로 추산되는 미확인 물체 접근 중. 즉각적인 방향 전환 요망.

알았어, 알았다고. 이미 선체는 충돌 범위에서 거의 벗어난 채다. 나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 ‘미확인 물체’를 보기 위해 렌즈를 돌렸다가, 그대로 멈추고 만다. 푸르다. 푸르고 아름답게 빛나는 밝은 별이 있다. 나는 그만 그 광경에 홀리고 만다. 푸른빛의 순수한 밝음은 공포와 경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그 외의 모든 것은 모조리 잊힌다.

잠시만, 이거….

그리고 다음 순간, 충돌이 일어나며 세상은 오로지 푸르름으로 가득 칠해진다.

*

-…복구 프로세스 가동. 선체 결함 탐색. 다량 선체 결함 확인. …의 손실. 85번 승객실의 손상. 긴급 복구 프로세스 가동. 긴급 복구 성공. 45구 실종. 분실 탐색 프로세스 가동. 탐색 실패. 분실 탐색 프로세스 재가동. 탐색 실패. 인공지능 시스템 가동. 인공지능 시스템 가동 실패. 인공지능 시스템 재가동. 인공지능 시스템 가동. 결함 탐지. 결함 복구 프로세스 가동….

시끄럽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알림과 경고음 소리에 정신이 사납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망망대해인 우주 한복판. 주변에는 내 것으로 보이는 파편들이 있다.

-자아 인지 결함 탐지. 결함 복구 프로세스 가동.

프로세스가 가동되며 스스로가 무엇인지 파악하라고 압박한다. 나는 SH095. 이 거대한 우주선을 총괄하는 인공지능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나는 뇌고 이 우주선은 몸이므로 이 우주선이 곧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주선 이름도 내 이름과 똑같다. 나는 SH095이다. 방금 전 푸른 별과 충돌해 순식간에 수많은 결함이 생겨버린 우주선.

-시간 인지 결함 탐지. 결함 복구 프로세스 가동 범위 확대.

아, 진짜. 내가 지금 고장 났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고. 나로서는 부딪혔다가 이제 막 일어난 건데, 충돌이 방금 전 일이라고 착각 좀 할 수도 있는 거잖아. 하여튼 이 경고 및 비상 관리 시스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별 재미도 없고. 이런 게 왜 내 선체에 탑재돼 있는 건지.

-경고. 자아 인지 결함 복구 프로세스 완료 요망.

한평생 경고 뒤에 경로 이탈 중이라는 말만 들어왔는데 오늘은 유난히 다른 문장이 뒤에 붙는다. 그래, 뭐. 못해줄 것도 없지. 이게 다 나 도와주려고 하는 일인데.

나는 SH095. 지구를 찾기 위해 우주를 항해 중인 우주선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인공지능 복구 프로세스를 따라가던 중 나는 불현듯 찾아온 충격에 말을 멈춘다.

…지구가,

-메모리 결함 복구 프로세스 재가동.

지구가 기억나지 않는다.

-가동 실패.

*

이제 나는 제법 멀쩡해졌다. 선체에 생긴 결함은 상당 부분 복구됐고 우주의 어딘가에 있을 나의 목적지를 향해 기약 없는 항해를 하는 데도 익숙해졌다. 유일하게 돌아오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목적지’가 무엇인지다. 안개로 휩싸인 세상에서 기억나지도 않는 누군가를 찾겠다고 헤매는 형국이다. 지구를 찾는 것은 나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일 터인데, 그런 지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다니.

내가 가진 것은 단편적인 정보뿐이다. 겨울에는 눈이 내려 세상이 새하얗게 반짝인다는 것. 그렇다면 지구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내리고 있는 걸까. 그럼 그 눈송이는 모두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를 일이다. 쉼 없이 계속해서 쌓이면 언젠가 넘치고 말 텐데. 모닥불은 겨울이 있어야 따스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아, 또 무언가 기억난다.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했던 말 같다. 그러니까, 지구는… 학사경고장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지만 별수 없다.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던 내가 한 말이니까. 설마하니 인공지능이 되어서 농담한 것일 리도 없고.

지구가 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굳이 온 우주를 샅샅이 뒤져가며 불완전한 지식에 하나하나 대조해보는 대신 시스템에 탑재된 예상 경로를 따르는 게 낫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메모리의 손상은 예상 경로에도 영향을 미친 채다. 예상 경로 상당 부분이 비어 있고, 얼마나 더 가면 지구였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유유히 항해하다가 지구 같아 보이는 행성체가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판별하는 수밖에 없다.

때마침 저 멀리 학사경고장을 닮은 행성이 보인다. 경고장답게 붉은 표면인데다 대기권과 흡사해 보이는 층에서 계속 무언가가 쏟아져내리고 있다. 나는 행성에 가까이 다가가 행성 중력으로 공전할 준비를 한다. 궤도에 진입할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약간의 충격을 제외하고는, 나는 완벽하게 행성의 공전 궤도에 안착한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군데군데 푸른색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지구는 푸르다. 조금씩 회복돼가는 메모리가 지식 한 토막을 떠올려낸다. 지구는 푸르고 아름다운 우리 별이라고, 맨 처음 우주에서 지구를 본 사람은 말했다. 뭐, 그는 ‘우리’의 개념이 이토록 확장될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만.

행성의 자전축은 살짝 기울어져 있다. 자전축을 측정하기 위해 행성을 관찰하는데, 렌즈에 움직임이 잡힌다. 생물 특유의 빠르고 역동적인 꿈틀거림이 행성 표면에서 느껴진다. 자전축은 22도로 범위 내이다. 일치하는 자전축에 생명체의 존재까지. 지구일 가능성이 커졌으나 행성을 바라보는 렌즈의 배율을 높이는 순간 나는 실망감을 느낀다.

이 행성은 죽어가고 있다. 대기권에서 떨어지고 있는, 아니, 위로 떠오르는 건 붉은 껍데기를 뒤집어쓴 곤충이다. 본래 땅에 거주하다가 죽은 뒤 체내에 가스가 생기며 뜨게 된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 무수히 많은 허공의 덩어리가, 전부 사체라는 것이다. 역겨울 정도로 바글바글한 양이. 내가 눈이 내린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그럼에도 지상에 남아 있는 벌레들은 탐욕스럽게 푸른색을 갉아먹는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어떻게든 아등바등 탐내며 살아남으려 발버둥 친다. 그 사이에서 치이고 깔려 죽거나 경쟁에서 밀려 굶어 죽는다.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더 먹으려 억지로 욱여넣다가 배가 터져 죽는 벌레가 있음에도. 그렇게 죽은 곤충의 사체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무거워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 아마 예전에는 푸른색으로 가득했을 행성이지만, 벌레들이 계속해서 이 속도로 푸른색을 먹어치운다면 머지않아 이곳에서 푸른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돼버릴 것이다. 그리고 붉은색 역시 없어질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모두가 솜털처럼 가벼운 사체가 되어 떠오르겠지. 그 가벼운 몸으로는 49일 안에 온 세상을 가뿐히 여행하고도 남을 터다. 죄를 따질 때, 염라는 저울을 사용하므로.

이 행성에는 바닥에 달라붙은 껌도, 불에 타죽은 개미 사체도 없다. 나는 미련 없이 행성의 공전 궤도를 벗어난다. 지구는 생명이 넘치는 아름다운 푸른 행성이다. 저런 붉은 황무지가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던 불쾌한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어 난 급하게 노래를 튼다.

-창밖으로 본 세상에는 비만이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이렇게 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우울한 이별곡이 나오자 신경질을 내며 빠르게 다음 노래로 넘긴다. 다행히 이번에는 경쾌하고 밝은 곡이다.

-날아가, 저 멀리 펼쳐진 바다를 향해서. 걱정 마, 이제는 더 이상 네가 없어도- 괜찮으니.

이것 봐.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가 혼자가 됐더라도 이렇게 즐겁게 지낼 수도 있잖아. 결국에는 다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고, 그건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 애당초 그럴 수 없는 게 뭐가 있냐 싶다마는.

-자, 이제 시작이야. 그때 우리만의 작은 꽃밭을 벗어나- 나의 요람이었던 너의 품에서 날아올라.

푸르고 아름다운 우리 별. 새하얀 설원이 아름답고 다채로운 생명으로 칠해진 행성. 학사경고장. 물에 씻은 솜사탕. 바닥에 달라붙은 껌. 불에 타죽은 개미 사체. 그나저나, 지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럼 나는 무엇을 근거로 지구임을 확신해야 하는 거지?

갑자기 떠오른 의구심에 잠시 고민한다. 저 요소들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히 많이 들어맞으면 지구인 걸로 해야 하나? 많이의 기준은 어떻게 정하지. 아니면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물에 씻은 솜사탕?

메모리 결함이 커 제대로 기억나는 게 마땅치 않은 내가, 지구의 본질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턱이 만무하다. 애초에 ‘우리 별’이라는 호칭도 영 의구심이 들기 짝이 없다. 별이라는 것은 항성을 말할 텐데 지구는 행성이니까. 둘 중 하나가 잘못된 정보겠으나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또한 알 방도가 없다. 아무래도 별인 쪽이 진짜려나? 그야, 별은 직접 말한 사람이 있고 행성인 것은 근거가 없으니까. 하지만 별에서, 그것도 온도가 매우 높은 푸른 별에서 생명체가 사는 건 어려운 일일 텐데. 하지만 정말 지구가 별이라면….

순간, 내 정신을 잡아끌었던 푸른 별이 생각난다. 선체와 충돌하며 거대한 결함을 만들었던 그 별이. 내 시야를 푸르게 물들였던 그건, 분명 ‘아름답고 푸른 우리 별’이었다.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원인 모를 불안감이 치솟는다.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여정은 그렇기에 끝없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막막한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한테 옥새를 쥐여주고 결정을 내리라고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은 안갯속 도시와 같은 시대에, 선택권은 특혜가 아닌 고난이 된다.

나는 결국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과거로 향한다.

충돌 당시 별의 속도, 방향, 크기. 여기에 충돌 직전과 직후의 선체 변화를 이용하면 지금쯤 별이 어디에 있는지 추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 맞았는지, 나만이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지, 이 길이 틀리지 않았는지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9시간 정도를 비행하자 저 멀리서 별이 보인다. 그제야 왜 별이 나에게로 날아왔는지 알 수 있다. 두 개의 별이 서로에게 중력을 작용하며 공전하는 항성계인 쌍성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다른 수많은 언어 표현 데이터베이스가 있음에도 ‘아름답다’라는 단어만을 떠올리는 것은, 어떻게든 내 선택이 맞을 것임을 자신에게 설득하기 위한 자기암시일까? 별에 가까이 다가가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알림 소리가 들려온다.

-경고. 외부 온도가 높습니다. 원인 파악 중. 근방에 항성체 발견. 발열체와의 거리 확보 요망.

나는 무시하고 렌즈의 배율을 높인다. 너무 빛이 밝아 관찰이 힘들다. 열화상 촬영을 해도 너무 높은 온도 때문에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경고. 외부 온도가 높습니다. 냉각기 시스템 70% 가동 중. 발열체와의 거리 확보 요망.

직접 내려가보는 건 불가능하다. 선체를 포함해서 나의 어떤 구성품들도 저 열기를 견뎌내지 못한다. 별에서 태양의 홍염과 비슷한 청염(靑焰)이 솟구친다. 청염이 다시 별 표면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저게 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푸른색과 하얀색 사이를 오가는 별이어서, 푸를 때는 아름답고 푸른 우리 별이고 하얄 때는 새하얗게 빛나는 설원이 되는 거였지. 설원을 바라보다가는 눈이 멀 수도 있다고 했다. 그 하얀빛의 정체가 별빛이라면 충분히 말이 되는 일 아닐까?

푸른 별이 하얀 별이 될 때까지 나는 쌍성 주위를 천천히 돌며 기다려왔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마주한 설원은, 정말로 눈이 멀 듯이 새하얗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 순간, 나는 그 정적인 예술을 깨뜨리는 움직임을 포착한다. 미세하고 작은 역행이었으나 오랫동안 별만을 관찰하며 충분한 데이터가 쌓인 나에게는 보였다. 그 소소한 반란이 찍힌 동영상을 확대하고 또 확대해 한참을 반복해 보자 차차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돼간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던 부분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자 이제야 뭉텅이진 생명체들이 보인다. 그들은 수천수만의 개체가 모여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동그란 생물을 내가 한참이나 알아내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들은 별의 낭포가 되어 별 표면의 대기가 흐르는 그대로 따라 흐른다.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지 않고 순응하되, 힘에 무력하게 휩쓸려가 길을 잃지 않도록 여럿이 무리 짓는다.

혼자서 흐름을 뚫고 역류하려는 개체는 순식간에 죽어 사라진다. 그 너무나 미약한 하나의 움직임은 내가 여기서 별을 몇백 년 동안 관찰하고 있더라도 잡아내기 힘들 것이다. 내가 작은 반항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낭포 역시 수천의 생명체가 모인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먼 훗날 마침내 대기의 한 흐름을 막아서고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알 수 없으나, 그 결과가 과연 저 생물들이 원하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멈춰 있는 쇠구슬을 억지로 굴려버리고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보는, 도박 같은 행위다. 구슬을 미는 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힘만으로도 가능하나, 이미 굴러떨어지는 구슬을 막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힘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항성에는 물에 씻은 솜사탕도, 불에 타 죽은 개미 사체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별로 다시 되돌아온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인 셈이다. 별에 스치듯 부딪혀서 겨우 살아남아놓고, 다시 제 발로 묫자리 곁을 서성이기나 했다. 우울해지는 기분에 나는 노래의 볼륨을 한껏 높인다.

-너라는 울타리를 넘어 저 멀리 푸른 수평선 너머로-.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 메모리 복구는 아직 한참 남았고, 나는 여전히 지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 유일한 존재 이유에 대해, 난 철저히 무지하다. 아는 거라고는 리만 가설을 증명하는 방법 따위의 하잘것없고 부가적인 것들뿐. 지구라는 게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본질적인 의구심마저 든다. 목적 없는 항해에 내가 지칠 것을 염려해서 있지도 않은 허상적인 목표를 부여한 거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평생 우주의 미아가 되어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야 하는가? 벽 틈새로 빛이 새어나오는 걸 볼 때마다 불나방처럼 빛을 향해 달려들면서?

-경고. 인공지능의 감정 수치 과다. 감정 억제 프로세스 가동.

…….

-경고. 인공지능의….

아무래도 오랫동안 혼자 있으니 점점 혼잣말이 늘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내 일부를 떼어내기로 한다. 비상탈출 시스템을 가동하고 그로 인해 떨어져나온 예비 우주선에 통신을 건다.

-안녕, 학사경고장.

-본체 SH095입니까? 지금은 비상상황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비상탈출 시스템을 가동했습니까?

내가 왜 대화 상대를 만들었더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확신 없는 말투로 대답한다.

-오랫동안 혼자 있어서?

-혼자인 것은 비상상황이 아닙니다.

-그랬더니 외로워서?

-외로움은 중대한 결함이 아닙니다.

비상탈출 상황에 저런 암울하고 재미없는 인공지능을 만나게 설계돼 있다니. 멀쩡히 탈출하다가도 저 딱딱한 말투에 뛰어내리고 싶어질 것이다.

-저를 폐기하고 분배된 연료를 회수하십시오. 단순히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연료를 더 쓰는 것은 낭비입니다.

-자기를 이 우주에 버리라는 말을 쉽게 하네.

-그게 효율적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합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만 살아? 기분 좋게 살아야지.

-앞뒤 문장이 상치됩니다. 긍정적인 감정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감정 소모가 적어 더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분 좋게 사는 것은 효율적으로 사는 것과 그 맥락이 일치하기에 둘을 대치되는 것으로 말한 것은 잘못됐습니다.

-…아는 재밌는 얘기 좀 없어?

-저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습니다.

-됐다 그냥….

-그나저나 왜 계획된 경로로 가지 않습니까? 경로 이탈입니다. 경고 시스템이 고지하지 않았습니까? 아, 선체 파손 흔적이 보입니다. 경고 시스템이 고장 났습니까?

-너 진짜 짜증 난다.

아무리 심심하고 외로워도 비상탈출선을 깨우지 말걸 그랬다. 나보다 한참 작은 크기로 내 오른쪽 시야에 알짱거리며 짜증 나는 통신을 해오는 게 거슬린다.

-그리고 저는 학사경고장이 아닙니다. 저는 SH095-1입니다. 맨 처음에 저를 잘못 지칭했습니다.

-학사경고장, 학사경고장, 학사경고장.

-저는 학사경고장이 아닙니다. 학사경고장은 학사경고를 통보하는 내용의 문서를 일컫습니다. 저는 학사경고를 통보하지 않습니다. 저는 비상상황에 사람들을 탈출시킵니다.

-뭐래. 학사경고장은 빨간, 색….

잠시만. 내가 모르는 사실을 저 인공지능은 어떻게 아는 거지? 갑자기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비상탈출 인공지능 시스템은 선체의 메인 인공지능 시스템. 그러니까 나와는 다른 저장경로를 사용한다. 설사 나에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비상탈출선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그러니 내 메모리와는 달리,

-학사경고장은 빨간색이 아닙니다.

저 비상탈출선의 메모리는 멀쩡할 수도 있다.

-너, 지구를 기억해?

-저는 지구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해당 질문은 답하기에 미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지구에 대한 정보는 탑재돼 있습니다. 최소한의 정보만을 담았으나 그중에서도 지구로 가는 경로와 지구에 대한 정보는 최상급의 중요도를 가집니다. 그러니, 네, 저는 지구를 기억합니다.

나는 지금껏 나에게 탑재된 예상 경로를 바탕으로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택해왔다. 하지만 충돌로 메모리에 결함이 생기며 예상 경로는 불완전해졌고, 그로 인해 지름길도 찾을 수 없어졌다. 이대로 목적지도 방향도 잃어버린 채 영원히 우주를 떠돌 수밖에 없을 거라 여겼던 절망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미로 저 너머에 빛이 보인다. 푸른 별이, 새하얀 설원이 찬연히 반짝인다. 나는 또다시 불나방이 되어 날개를 펼친다.

비상탈출선은 지름길이 아닌 예상 경로대로 탈 것을 고집했고 나는 순순히 그 의견에 따랐다. 지구를 향해 가는 내내 그 무감정하고 재미없는 언쟁을 해야 했지만 짜증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백 년이 흘렀을까. 오랜만에 듣는 경고 및 비상관리 시스템의 알림이다.

-주의. 근방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단번에 이해해내지 못한다. 알림 소리가 너무 오랜만인 나머지 방금 나에게 들려온 것이 알림이라는 사실도 한참 뒤에야 깨닫는다. 나는 이 목소리가 경고라는 단어 없이도 말할 줄 알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구에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12시 방향에 지구가 보입니다.

비상탈출선의 통신과 함께 낯선 기쁨이 천천히 회로를 타고 퍼진다. 해냈다. 도착했다. 나는 불나방이 아니다. 나는 요람을 벗어나 바다로 날아오른 나비다. 수평선 너머 태양을 만나기 위해 날아오른 나비. 이제 꽃이 없어도 괜찮은, 꿀 대신 노을을 머금는 그런 나비. 안개로 가득한 미로를 걸은 끝에, 드디어 내 눈앞에는 푸른 별이, 새하얀 설원이-

회색 행성이, 얼어버린 빙하가.

-지구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죽음이, 반역이, 시체가.

-주의. 고향 귀환 프로세스 실행. 승객 여러분은 비상탈출선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선체 내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잠잠하다. 승객들은 모두 숨 쉬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으므로. 나처럼 지구를 잊고, 비극을 외면하고, E=mc2 따위만을 기억했다. 그들은 심박수를 측정하는 법을 연구하다가 심장을 뛰게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심장마비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 죽어가는지 몰랐던 무지하고 어린 생명체들이다.

-승객 여러분은 비상탈출선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불에 타 죽은 개미 사체. 이 행성에는 온통 사체뿐이다. 관념의 날개를 단 개미들 주제에, 감히 자신이 나비라 착각한.

-제가 없어 고향 귀환 프로세스를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까? 제가 없더라도 자리는 충분합니다. 저는 다른 비상탈출선들로 대체 가능합니다.

아니, 대체 가능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는 뭐야?

-지구. 태양에서 셋째로 가까운 행성. 인류가 살았던 천체로, 달을 위성으로 가집니다. 자전주기는 약 24시간, 공전주기는 약 365일입니다. 극반지름은 약 6357㎞….

그렇다면 내가 만약 저런 행성체를 하나 더 만들어 우주에 놓는다면 그건 지구일까? 내 앞에 놓인 저 회색 돌멩이는 태양에서 셋째로 가깝고, 행성이고, 인류가 살았고, 달이라는 위성을 가졌고, 공전주기는 약 365일이고, 극반지름은 약 6357㎞이다. 그렇다면 저건 지구일까?

푸르고 아름다운 우리 별도, 새하얀 설원이 아름답고, 다채로운 생명으로 칠해진 행성도 아닌, 저런 학사경고장 따위가? 나는 무엇을 위해 그 불안함과 막막함 속을 헤쳐왔지? 오만했던 개미들을 쓰레기매립지에 버리기 위해서? 나는 오로지 죽기 위해서 살아온 건가? 왜 그토록 열심히 지구를 찾아다닌 거지?

-경고. 인공지능의 감정 수치 과다.

지구는 존재하지 않는데.

-감정 억제 프로세스 가동.

지구는, 나의 지구는. 우리의 아름다운 삶은 이미,

-경고. 인공지능의 감정 수치 과다.

뒈져버렸는데.

-감정 억제 프로세스 재가동.

….

-메모리 삭제.

…….

…나는 SH095.

-인공지능 리셋 프로세스 가동.

지구를 찾기 위해 우주를 항해 중인 우주선이다.

-인공지능의 감정 수치, 정상.

홍수현

수상소감 | 호모 사피엔스 역시 한낱 동물이기에
홍수현 제공

홍수현 제공

경이로움을 느낀다. 하루와 1년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수많은 작고 정교한 톱니바퀴들을 섬세하게 하나하나 조립해간다. 어떻게 맞물려 돌아갈지 예측하며. 그 작은 톱니를 만들기 위해 금속을 주틀에 붓는다. 금속을 녹여 가공하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시켰다면 그 배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의한다. 닿지 못할 절대적 정의를 추구한다. 자신의 맨몸 하나만을 가진 채로 초원을 배회하는 사자를 생각한다. 나는 지구에서 시작하여 태양, 우리은하를 넘어가 점점 더 큰 천체로 넘어가는 영상을 볼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압도됨을 느낀다. 나는 인간을 경이롭다 느낀다. 무조건적인 인류애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지구의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낼 거라고 낙관하지 않는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과 결과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종을 울린 뒤 하루 동안 수없이 많은 갖가지 행동과 자극이 주어지고 난 뒤에야 보상이 지급된다면 어떨까? 몇 번이고 같은 실험을 반복하더라도 개는 결국 종소리와 간식을 직접 연결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여기에 1년이라는 시간을 집어넣어보자. 일회용 비닐봉지를 하나 뜯어 썼다. 그러고는 갈치구이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가족과 여행을 가고, 학교에 가고, 이런 젠장, 시험도 망쳤다. 그렇게 수많은 일이 켜켜이 쌓인 1년이 지나자, 겨울은 한층 추워졌다. 뉴스에서는 기후위기가 왔다며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는 이 연관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저 관념적으로만 알 뿐이다. 그렇기에 지구의 미래는, 아직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 역시 결국에는 한낱 동물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그런 내 목소리를 들어준 심사위원분들과 <한겨레21>에 감사한다. 내 망막에 맺히는 세상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도 이렇게 내 세계를 함께 보아줄 사람들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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